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재관 (문단 편집) == 독재관의 위상과 권력 == 독재관은 특정 문제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았기에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그들은 [[집정관]], [[법무관]], [[감찰관]]처럼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때 셀라 큐루일스(sella curulis: 두 쌍의 청동 다리가 받치는 접이식 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보라색 줄무니가 있는 [[토가]]인 '토가 프라이텍타(Toga Praetexta)'를 착용할 수 있었다. 또한 집정관이 [[릭토르]]를 항시 12명 거느린 데 비해, 독재관은 로마 바깥에서는 24명, 로마 내에서는 12명 거느렸으며, 집정관이 거느리는 릭토르들은 도끼 날을 달지 않은 [[파스케스]]를 들고 다니는 데 비해 독재관의 릭토르들은 도끼 날을 달은 파스케스를 들고 다녔다. 이는 독재관들이 삶과 죽음까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으며 집정관들보다 특별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독재관이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수는 없었다. 명확한 한계가 정해진 적은 없지만, 집정관, 법무관 등 고위 행정관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었으며, [[원로원]]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호민관이 독재관의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고발할 수 있었다. 리비우스는 독재관이 실시한 선거를 거부하겠다고 위협한 호민관들의 사례들을 저서에 싣기도 했다. 게다가 독재관이 퇴임한 후 재직할 때 실시한 정책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독재관들이 섣불리 행동하기 힘들었다. 독재관은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한 명뿐이었지만, 독재관이 사임한 후 새로운 독재관이 지명될 수도 있었다. 또한 독재관이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간주될 경우 직위를 사임하도록 강요받을 수 있었으며, [[신탁]]에 따라 독재관이 물러나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가령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는 기원전 333년 [[삼니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독재관에 선임되었지만, 선임 과정에서 종교 의식에 결함이 있었다는 이유로 사임해야 했다.[* 로마 제국에서도 [[종교]]의 영향력이 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로마 제국은 종교를 믿는다기보다 '''이용했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종교란 평민에게는 진실로, 현인에게는 거짓으로, 통치자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 이 사실을 잘 나타낸다. 애초에 로마의 수많은 의사진행 방해 방법 중에 하나가 방해하는 파벌에 속한 [[신관]] 등등이 [[천둥]]이 쳤다든가 징조가 불길하다든가 핑계를 대서 투표를 막는 것이다. 다만 이것도 무조건 통하는게 아니라서 카이사르 같이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 등 종교적 직책을 가진 사람이 무효를 선언 하면 끝이다.] 설령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재관에 뽑히더라도 원로원과 민회가 부당한 선임이라고 간주하여 취소될 수 있었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249년 집정관)|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중이던 기원전 249년 집정관에 선임된 뒤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참패한 뒤 로마로 소환되었다. 당시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역시 카마리나 인근에서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막대한 함대를 잃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여기고 풀케르에게 독재관을 지명하라고 명령했다. 풀케르는 자신의 전령이자 해방노예의 아들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글리키아를 독재관으로 지명했고, 글리키아는 풀케르를 독재관으로 추대한 뒤 기병장관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무효로 처리했고, 시민들은 "경솔하고 무모하게 처신하여 참패를 초래한 주제에 참으로 뻔뻔하고 옹졸하다"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결국 풀케르는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받을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이렇듯 현실적인 제약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독재관들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한 뒤 곧바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파트리키]] 신분으로 본래 로마 정계에서 활약했으나, 장남 카이소가 호민관을 구타한 후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사건으로 인해 아들을 대신해 막대한 벌금을 지불한 후 티베르 강 오른쪽 둑에 4에이커 가량의 농지를 구입한 뒤 그곳으로 내려가서 농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주변 부족들과 전투가 벌어지자 원로원은 킨킨나투스의 농장에 그를 모시러 갔고, 그는 선선히 따라나서 독재관으로 취임해 16일만에 적을 무찌르고 독재관을 사임했다. 로마에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자 다시 독재관에 취임해서 이번엔 20여일만에 국난을 해결하고 독재관을 사임한 뒤 노구를 이끌고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농사에 열중했다. 그의 사례는 공공에 대한 봉사, 애국, 겸손, 절대권력을 내려놓은 공화주의의 이상을 나타내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져 여러 장소에 킨킨나투스를 기리는 이름이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시내티]]의 이름이 킨킨나투스에게서 유래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