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국통감 (문단 편집) === 삼국, 고려시대의 재평가 === * [[권근]]이 [[계백]]을 두고 아무리 나라 위한 일이라지만 가족을 모두 죽여 대를 끊음은 옳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을 두고, 동국통감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에 대한 비판으로 옳지 않다.'고 깠다. * 신찬동국통감은 신라적통론을 내세우며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재평가하며 후기 신라를 띄워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라의 몰락을 [[진성여왕]]을 시작으로 한 900년대를 몰락의 기점으로 잡았다. * [[경순왕]]의 항복을 [[유선(삼국지)|유선]]과 [[손호]]와 동급으로 보며 격하하고 [[마의태자]]를 띄운 첫 사례이다. 이는 너무 논란만 가중시킨 비판으로 가뜩이나 조선왕조에서도 경순왕의 후손들이 과거를 통과해 관료생활을 하고, 그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후손들은 대체로 삼국사기를 선호해서 문무왕, 신문왕기의 신라를 극찬했다. 800년대 사찰이 널부러지고 신라의 귀족 세습과 녹읍 체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에, 신라보다 고려, 더 나아가 조선이 낫다고 보기에 경순왕의 항복은 고려는 물론 더 나아가 조선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기에 괜한 논란을 일으켰다. 더욱이 우왕, 창왕, 공양왕은 경순왕과 태도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이후에는 경순왕을 그들보다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어찌보면 고려 태조의 정당성을 내리기 위한 시도라는 설이 있다.그리고 실제로도 경순왕은 유선이나 손호에 비하면 굉장히 나은 축이다. 그래도 나라를 어떻게든 유지해보려다가 안 되자 그래도 자신과 백성들을 더 보존해줄 쪽을 잘 골라 항복한 점에서 그들과 동급 취급받는건 경순왕에겐 모욕이다. 유선은 나라를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구할 기회 정도가 아니라 당시 정세(고평릉 사변, 사마소 시군, 독발수기능의 발호)를 볼 때 제 할 일만 했어도 [[강유]]가 준비한 일발역전의 패가 (정난의 변과 비슷하게) 먹힐 수 있었다.] 걷어찬 암군이고 손호는 손권의 실책과 손준-손침의 막장라인도 있었지만 그래도 손휴가 되살리던 것을 다시 망친 폭군이다. * [[신무왕]]을 띄우고 [[장보고]]를 띄우며, 염장을 간신배로 묘사한다. 장보고의 죽음에 [[문성왕]]은 실책을 범하게 되고 반역의 의심을 받아 죽었다고 장보고를 더 높이 평가했다. 삼국사절요와 더불어 장보고가 신라의 충신으로 기록된 사서이다. 삼국사기에선 장보고의 반역에 대한 논평은 없고, 대신 그의 동반자 신무왕이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당연하지만 [[동국사략]]과 마찬가지로 신라적통론을 밀며 신라의 후반부를 띄워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 [[고려]]에 대해서도 꽤나 깐깐한 평가를 내린다. * [[윤언이]]의 평가가 안좋게 나오는데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와 도교 등을 믿었다는 이유이다. [[윤관]]의 평가도 생각만큼 크게 높지 않다. 당시 윤필상도 건주여진을 토벌하고 경상도 지역 백성들에게 재산을 주는 등 같은 파평 윤씨인 윤언이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다. 사실 이는 윤필상의 견제를 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언이의 후손이 문정왕후, 윤원형이다. * 고려 성종을 고려조 최고 성군으로 치켜세우나, 정작 장원제도로 공음을 강화하고 공신후손 우대로 음서의 빌미가 되어 이걸 뜯어고친게 개국공신들이다. 반면 고려 광종을 평가절하한다. 이는 조선왕조의 공신우대와 신분제 유지와 같은 현상유지론과 밀접하지만, 어차피 고려 성종 시절 나온 여러 제도들은 조선왕조에 혁파되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의 영향으로 향소부곡민 폐지, 장원제 폐지와 과전, 그리고 무과의 도입과 정착까지 그로 인한 음서의 축소까지도 있다. 그럼에도 성종에 대한 평가가 좋은 이유는 아무래도 저자인 사관들이 '''신하'''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신하들에게 이것저것 퍼 준 왕이 더 곱게 보일지 숙청하고 빼앗는 왕이 더 보기 좋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래도 고려성종도 자기 집안 단속이나 잘할 것이지 남한테 뭐라하냐며 깐다. 그리고 고려 성종의 치세는 성종으로 끝났다고 한다. * [[만부교 사건]]을 처음으로 비판한 사서다. 고려조 [[이제현]]은 어차피 고려 태조의 일은 모를 일이고 어차피 서희 대감처럼 하지 않아도 만부교 사건 안 해도 쳐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고려 말 권문세가들이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한 것을 언급하며 '이들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제현은 이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죽었기 때문에. 서희의 담판외교를 근거로 만부교 사건은 방도를 잃었다곤 하는 시각으로 썼다. 몽골과 달리 거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송을 옹호해도 오대십국체제를 부정한 셈이다. * 공양왕이 아니라 공민왕 때 고려가 사실상 끝났다고 평가한다.[[정도전(드라마)|드라마 정도전]]은 이를 통해 공민왕을 다뤘다. 단 막판 공민왕과 정도전의 만남으로 공민왕이 사람된다는 이야기는 각색이다. 그런데 조선초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유는 진짜로 공민왕 대에 고려가 망해서라기 보다는, [[신돈|신우 신창]]의 '우창 비왕설'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 사서에서 [[우왕]]과 [[창왕]]은 모두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었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둘을 '''반역자 취급'''을 하고 있다. 이는 조선건국의 정당성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명목상으로 이성계에서 선위를 한 인물이기 때문에 비판하기가 뭐하고, 우왕과 창왕은 고려왕이 아니라 반역자이니 고려의 실질적 마지막 왕은 공민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공민왕]]이 워낙 까인 덕택에 [[충정왕]]을 재평가했다. 이유는 공민왕이 조카 충정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로 만들어 [[위화도 회군]]과 관련해 조선 태조의 문제를 덮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공민왕과 똑같이 [[단종(조선)|조카]]에게서 [[계유정난|왕위를 찬탈]]한 [[세조(조선)|이 분]]을 [[조의제문|돌려까기한 건지도]] 모른다.-- * [[김보당의 난|계사의 난]]을 일으킨 [[김보당]]을 [[고려사]] 열전에 넣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김보당이 고려사 열전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김보당이 무신정권에 붙었다가 이후 의종 복위에 가담해서이다. 김보당이 말과 행동을 바꾸었고 죽기 전에 실토해버린 바람에 기회주의적인 면모 때문에 열전에 넣지 않았다. 그리고 단종과 달리 의종은 폐위를 먹어도 할 말 없는 암군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