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군연합 (문단 편집) == 역사 == [[유럽]]에서는 [[혈통]]에 따라서 군주의 지위와 [[영지(역사)/유럽|영지]]가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에 때때로 발생한다. 다만 [[살리카법]]이 있는 [[프랑스 왕국|프랑스]] 등의 경우 부계 혈통 또는 남계 혈통만 인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프랑스-나바르 동군연합의 경우 [[카페 왕조]]의 직계 남계가 단절되자 카페 왕조의 방계 남계인 [[발루아 왕조|발루아]]의 [[필리프 6세|필리프]]가 프랑스를, 카페 왕조의 직계 여계 자손인 잔느([[후아나 2세]])가 [[나바라 왕국|나바라]]를 물려받으며 다시 분리되었다. 어떤 형태의 동군연합이든 [[국민]]의 [[권리]]가 통합 전이나 후나 변동이 없다는 점은 같다.[* 이는 우선 동군연합 자체가 개인의 복수 신분이 각국 국가원수라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각 국가는 상호 간에 법적으로 동맹 이상의 관계가 아닌 점, 이러한 현상이 주로 같은 종교권(특히 기독교세계)에서 발생하였는데, 보편종교로서 민족·문화를 초월하는 국제성, 통치가문이 서로 통혼하여 인척관계를 형성하면서 발생하는 신분·계급적 연대의식에서 기인하였다. 그래서 국민국가가 완성되어가던 근대에는 민족적 차이가 큰 동군연합이 해체되거나 동질성이 큰 동군연합이 법적으로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동군연합 체제에 대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컸다. 가령, [[카를 5세]] 당시에 결성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왕국]] 동군연합의 경우, 둘 다 [[가톨릭]]이 국교이긴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이미 수많은 제후들이 [[루터교]]로 개종한 탓에 [[개신교]]에 대해 마냥 탄압으로 일관할 수 없었지만[* 카를이 비록 황제이긴 하나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선거군주제인고로 실제 그의 통치력은 어디까지나 그의 직할 영지에 한정되었다.] 스페인은 수많은 개신교인들을 [[이단]] 심문으로 싹 다 [[화형]]시켰다. 또, 현재까지 [[영국|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현존하는 동군연합 체제인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 동군연합에서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국교]]로, 스코틀랜드는 [[장로회]]를 국교로 하는 등, 적용되는 [[법률]]이 제각각이었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기업의 경우로 바꿔보면 편하다. * A그룹 회장이 B그룹을 인수합병해 B간판 내리고 A산하 사업부, 지사 등으로 만들면 보통의 통합, 흡수, 병합, 합병이다. * A그룹 회장이 B그룹 회장에 취임했지만(CEO건 지분 인수건), 그 둘을 통폐합하거나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동군연합이다. 계열사 간 연계 효과를 위해 통폐합하는 경우가 많지만, 굳이 그럴 유인이 없거나 그 회사의 사내 분위기 변질을 막기 위해 지배지분만 먹고 회사 자체를 놔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동군연합 개념과 유사하다. 물론 [[유럽]]도 나중에 가면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외국계 왕실이 자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마뜩찮아하기도 했으나, 원래는 동군연합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곳이라서 [[민족]]별로 자치권을 주거나, 군주가 "'''나도 이 나라 사람이에요.'''" 하고 그 나라의 [[문화]]나 [[종교]]로 전향하려는 노력으로 반발이 수그러드는 경향을 보였다. [[헝가리 왕국]]에게 [[대타협|자치권을 주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중제국]]을 설립한 [[합스부르크 왕조]]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어난 반 [[독일제국|독일]] 여론 탓에 독일계 왕실에 대한 반감이 늘자, 자기들도 [[영국인]]임을 어필하고자 왕가의 이름까지 갈아치운 [[윈저 왕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는 아주 일찍이 [[국민국가]](nation state) 혹은 국민의 전신격 정체성이 형성되어서 외국 군주를 섬기는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던 [[아시아]]권과는 다른 부분이다.[* 동아시아는 이미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례처럼 '''[[고대]]'''에도 [[총력전]]을 벌일만큼 고도로 중앙화되었고, 동시에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이질감이 큰 겨레 간에 대규모 전쟁이 많았다. 따라서 전쟁 양상도 개인이 보유한 권리 주장에 대한 전쟁이 벌어진 유럽과는 달리, 차라리 정복, 흡수 및 동화를 전제한 민족 간 ~~[[캐삭빵]]~~ 정복전에 가까웠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는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국민정체성 및 근대적 국가체계가 일찌감치 성립하였다고 평가되고는 한다.] 예를 들면 [[일본 제국]]은 [[한일강제병합]] 당시 일본 [[천황]]이 한국 [[황제]]를 겸하지 않고 그냥 아예 자국령으로 흡수하였는데, 전통적으로 타국의 형식을 남겨둔 채 동군연합을 구성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제국주의]] 및 [[민족주의]]시대에 그러한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인 구조를 취할 이유가 없던 까닭이다.[* [[대한제국]] 말에 일부 지식인들이 [[대한제국|한]][[일본제국|일]] 동군연합을 꿈꾸고 [[일진회]]라는 단체를 수립하고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에 적극 협조했으나, 정작 합방 후에 [[일본 제국]]과 [[조선총독부]]에 의해 [[토사구팽|일진회 전체가 가차없이 내버려졌다(...)]].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이라는 [[바지사장]]으로 존속시키기는 했지만, 이들은 일본제국 [[귀족]]([[화족]]의 일종 [[이왕가]] [[조선귀족]]으로 취급되었지, 별도로 대한제국 및 그 귀족을 설정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이 [[무굴 제국]]의 황실을 폐지한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것은 무굴 제국 황실이 [[세포이 항쟁]]을 지원한 것이 황실 폐지의 명분이 된 점과 무굴 제국 황실부터가 인도의 기층민중 대다수를 이루는 [[힌두교]]도 관점에서는 [[영국인]]들보다 인도에 조금 일찍 들어왔을 뿐 [[이교도]], [[이민족]] 지배자라는 사실은 다를 바 없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몽골]]-[[튀르크]] [[이슬람]] [[왕조]]나 [[앵글로색슨]] [[기독교]] 왕조나~~ 동군연합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지만, 매우 드물어도 있기는 하다. [[만주]]의 [[칸]]이자 [[청나라]] 황제가 [[몽골 제국]]의 [[대칸]]과 [[티베트]]의 [[전륜성왕]][* 본래 [[전륜성왕]]이란 [[인도반도|인도 문화권]]에서의 이상적인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티베트]]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티베트 전체를 통치하는 세속 군주의 명칭으로 쓰였다.]을 겸한 것이 그 사례다. 물론 이 사례는 실질적으로 중국에 세워진 [[만주인]] [[정복왕조]]가 몽골과 티베트 등을 본토에 가깝게 지배하고 있었던 사례이기에[* 즉 [[청나라 치하 티베트|티베트]]-[[청나라 치하 몽골|몽골]]의 각 정부가 [[번국]]인 조선만큼도 자치권을 받지 못해, 실질적으로 충분히 '연합'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로서 성립된 단계에 있지 못했었다는 뜻이다.], 굳이 따지면 상기한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관계에 더 가까운 봐야한다. 그런데 사실 역사를 확인하면, 동아시아에서도 유럽식 동군연합까지는 아니어도 그와 유사하게 복수신분을 활용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일 정도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우세한 입장에 있던 자들이 자신들 주요 가문의 남성이나 [[여성]]을 [[정략결혼]]시킨 사례들도 있는데, 당연히 괜히 그런 일들을 한 것이 아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Heqin]].] 실제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서, [[조선]]만 봐도 초기에 [[세종(조선)|세종]]에게조차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명나라]] 사신들도 명나라 황실과 인척 관계인 사람들한테는 아랫사람 취급받았다.[* 군주들도 명나라 사신의 횡포가 심하면 그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들은 오히려 조선에서보다 명나라에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더 강하기도 했다. 그래서 외교나 조공 문제에서도 굉장히 활약했다.] 조금 올라가서 [[고려]]의 사례를 보면 더 극명해지는데, 고려 왕이 [[원나라]] 황제 사위로서 나라를 다스려 부마국인 덕분에 원나라 사신이 이전처럼 완전히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못하게 되었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원 황실의 사위'를 강조해야 하니 고려왕이 자발적으로 원의 영향력을 앞세워야 하는 부작용은 있었다. [[천자]] 즉위까지는 실패해서 그렇지, 다른 사서들을 참고해도 [[중국인]]이 [[탱리고도선우|선우]]나 [[태국]]의 군주처럼 높은 작위들은 얻어낸 사례들이 있었으며 [[보바이]], [[양응룡]] 등도 자기 밑에 있던 서로 다른 민족 출신자를 동시에 수하로 부리며 난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했다. 제위 찬탈도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실패해서 그렇지, 정통성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기는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