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남아시아 (문단 편집) === [[식민지|식민통치]] === [[파일:East Asia map 1897.png|width=550px]] 각종 향신료 등이 풍부한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 등 [[남아시아]]나 [[석유]]가 풍부한 [[중동]]과 더불어 자원이 풍부하고 향신료의 주요 산지인지라 열강들에게 크게 수탈당했던 역사가 있다. 대표적 열강국가인 [[영국]],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심지어 [[일본]]과 [[미국]]까지 당시에 힘 좀 쓴다는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어 아수라장을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 지역이다. 가장 먼저 [[믈라카]] 및 그 주변 지역이 일찌감치 식민지 경영에 나섰던 [[포르투갈]]에 점령당한 뒤 나중에 차례로 [[네덜란드]]와 [[영국]]에 먹혔고 [[인도네시아]] 군도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이 들어왔으며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이 모두 각축을 벌이다 최종적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되었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모두 오스트로네시아계 무슬림 주민이 다수를 점하는 국가지만, 각각 영국과 네덜란드가 나눠 점유하는 과정에서 역사가 나뉘어 다소 이질적인 나라가 되었고 서로 사용하는 언어도 조금 차이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각 지역마다 별도의 언어들이 사용되지만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표준어로는 말레이어의 일종인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된다. 단,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의 인도네시아어에는 방언적 차이와 표기법의 차이가 상당히 존재한다.] [[19세기]]가 되면 인도를 정리한 영국과 베트남으로부터 뻗어나간 프랑스가 태국을 사이에 두고 충돌했다. 이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태국은 영토와 이권을 상당 부분 잃기는 했으나,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동남아시아 지역 대부분이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 되거나 점령 하에 들어갔던 와중에, 태국은 국토의 사용 권리를 일본에 내줌으로써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태국은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과 다를 바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면서 동남아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눈을 떠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나, 지배 주체가 해당 전쟁의 승전국이라서 식민당국은 쉽게 독립시켜주지 않은 채 가혹하게 탄압하기만 했다. 독립운동의 선구자들이던 지식인들은 현실에 순응하고 온건적으로 변한 반면, 같은 시기 러시아에서 불어 온 사회주의 혁명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좌익 독립운동 세력들은 식민당국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으며 무기를 들고 끈질기게 투쟁을 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당시엔 [[일본 제국]]이 [[남방 작전]]을 실행에 옮기고 전 동남아시아가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 이후 태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게 되고 나머지 국가들은 일본이 직접 통치하거나 일본의 괴뢰국이 되기도 했다. 일제가 이렇게 쉽게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서구의 식민지 상태였던 이들 국가의 주민들이 원래 통치자들에게 반감을 느끼고 일제를 해방자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중국인이 다수로 반일 감정과 친영 성향이 강하던 싱가포르는 중국계 민병대가 영국군을 도와 일본인 침략자들에 맞서 결사항전했다.] 하지만 일제가 2차대전 중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행했던 수탈 강도는 그전 열강의 수탈은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높았으며 특히 싱가포르나 미얀마 같은 곳은 학살이 벌어졌다.싱가포르가 가장 수위가 높아 [[영국 해군]]의 야전병원으로 쓰이던 창이 병원에선 영국군 장병과 중국인/말레이인 민간인으로 구성된 환자들을 전원 도륙내고 간호사들은 겁탈한 뒤 살해하는 만행을 벌이기도 했고 창이, 풍골, 셈바왕, 주롱 등 각 해안가에서는 중국인들을 소총으로 쏴 죽이고 목을 베어 수급을 챙기는 등 [[난징 대학살]]과 같은 학살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는 특히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뒷감정이 있어 [[1991년]] 가이후 도시키 총리의 동남아시아 국빈방문 때 라자라트남 당시 싱가포르 외무장관이 공식적으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을 항의하기도 했다. [* 싱가포르는 현재도 울분을 갖고 젊은 세대조차 교육을 통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알 정도로 원한이 깊은 편이다. 싱가포르가 일본과 경제력이 대등한 선진국인지라 아쉬울 것도 없어서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에 따로 코너를 만들어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하고 일본군이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을 대거 학살한 숙칭 대학살 기념비를 [[차이나타운]] 한복판에 만들어 일본군의 만행을 전세계 관광객에게 떡하니 알리고 있으며 시내 한복판의 7성급 스탬포드 호텔 앞엔 숙칭 대학살 추모탑을 만들었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들리는 곳이며 싱가포르인들에게 가한 만행을 사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의 학살극이 심했던 풍골 비치와 창이 비치, 셈바왕 비치 등에는 목 없는 중국인 귀신이나 2차대전 당시 아라사카 소총 격발음, 군복 입은 백인 귀신 등 귀신 목격담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이들 국가에서도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지다 못해 식민제국에 대한 조직적인 독립전쟁이 일제쪽에도 돌려서 시작되었고 특히 [[베트남]]의 위인 [[호찌민]]은 이때부터 일제에 맞선 공격을 시작, 태평양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미군]], [[영국군]], [[국민혁명군|중국군]]이 동남아시아로 진격하다 특히 베트남도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패전 이후에도 가해자인 일본 측에서 "일본의 식민지 경험을 받은 게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펼쳐 비판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