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두천시 (문단 편집) == 역사 == * 관련 문서: [[양주시/역사]] ||<-11> [[파일:동두천시 CI_White.svg|height=25]] '''{{{#fff 동두천시 행정구역 변천사}}}''' || ||<|2> [[양주시|양주군]] 이담면[br](楊州郡 伊淡面) ||<|2> {{{#fff '''→'''}}} ||<|2> 양주군 동두천읍[br](東豆川邑, 1963) ||<|2> {{{#fff '''→'''}}}|| 양주군 동두천읍 ||<|2> {{{#fff '''→'''}}}||<|2> 동두천시[br](東豆川市, 1981) ||<|2> {{{#fff '''→'''}}} || 동두천시 ||<|2> {{{#fff '''→'''}}} ||<|2> '''동두천시''' || || [[포천시|포천군]] 포천면 탑동리[br](塔洞里, 1973) ||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br](上牌里, 1983) || [[고구려]] 시절에는 내을매현(內乙買縣)이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천현(沙川縣)으로 승격되어[* [[경상남도]] [[사천시]]와는 이름만 같고 상관은 없다. 사천현은 동두천의 탑동, 광암동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 구 이담면, 묵은면과 현내면 등 양주 은현면 일대였다.] 견성군(堅城郡, 현 포천시 일대)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현종 9년(1018) [[양주시|양주]]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때는 태종 13년(1413) 양주도호부에, 세조 12년(1466) 양주목에 속한 일담면(一潭面)이었으나, 후에 이담면(伊淡面)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양주군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의정부와 비슷하게 원래 있던 [[면(행정구역)|면]] 이름이 그대로 [[읍(행정구역)|읍]]으로 승격된 것이 아니고, 면의 중심지인 동두천리의 이름을 따라 개칭된 것이다.[* 동두천이라는 지명은 세조 12년(1466) 양주목 승격 후 가정자리(柯亭字痢)를 하천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있어 동두천(東頭川)이라 고쳐서 부르다가 표기가 동두천(東豆川)으로 변한 것이다.] 1973년에는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塔洞里)를 편입시켰다. 이후 [[1981년]] [[7월 1일]] 시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2월]]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가 편입되었다. 해방 전에는 보산동 일대가 중심이었으나 [[6.25 전쟁]]으로 동두천 일대인 보산동 일대가 폐허가 된 이후 미군이 그 일대에 주둔하게 된다.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된 동두천 보산동 일대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그 일대는 미군과 외국인을 위한 위락 시설이 집중됐고 민간인의 생활 공간은 이보다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현재의 [[생연동]]이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동두천의 근대 건축물[* 문화극장, 동광극장이 대표적.]이 대부분 [[1960년대]] 이후에 생연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조성, 분포돼 있는 것은 6.25 전쟁 이후에 보산동 남쪽 생연동을 중심으로 성장한 동두천의 도시 연혁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두천에 주둔했던 미군부대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경제적 궁핍기에 동두천을 여타 지역에 비해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미군을 통해서 유입되는 첨단 서구문화로 국내 여타 도시보다 오히려 앞서 문화적인 풍요를 누리기도 했다. 한 때 동두천과 의정부 일대는 서울의 미8군 클럽과 함께 [[1970년대|1970]],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는 대중가수들의 요람이기도 했다. [[1998년]] [[11월]] 내행동과 광암동을 통합하여 불현동을 설치하고, 생연3동과 생연4동을 통합하여 중앙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동안동과 소요동을 통합하여 소요동으로 변경하였다. [[2007년]] [[5월]], 인구 과밀로 인하여 기존의 불현동을 불현동과 송내동으로 분동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