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래읍성 (문단 편집) == 구조 == 조선 전기에 현재의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원형의 읍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pds21.egloos.com/a0105007_4fffa78175d6b.jpg]] 발굴조사 결과, 조선 전기에 쌓았던 읍성은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크기의 17%가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으며, 성벽에 치(雉)가 아주 조밀하게 돌출되어 있었고 작지만 해자도 둘러져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다. 사진 정면에 성벽 일부가 산자락에 걸친 부분이 보이는데, 이 동쪽 체성을 왜군이 뚫고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과 사진 속 성곽 및 임진왜란은 상관이 없다. 임진왜란 때 1군에 종군한 요시노 진고자에몬(吉野甚五左衛門)의 비망록에 따르면 "[[부산진 전투|어제 성]]보다는 닷 배는 큰 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조선의 모든 성채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이는 성채"라는 표현이 있으나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파일:external/ncache.ilbe.com/8c5d3839be2a38b8593712a0fe507d61.jpg]]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은 1731년 정언섭(鄭彦燮)이 개축한 것을 기초로 한다. 5개의 문과 1개의 암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3개의 장대를 갖추었다. 또한 모든 문에 옹성이 둘러져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