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군 (문단 편집) === 콤니노스 왕조 시대 === 대귀족들의 혼란 속에서 [[셀주크 제국]]의 위협이 커지자 10세기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제국은 다시 위험에 처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중앙군 타그마의 대다수를 날려먹은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상실했고 덤으로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족에게 이탈리아 남부까지 빼앗긴다. 그 결과 간신히 유지되던 테마 제도가 완전히 붕괴하여 제국의 외곽방위선이 유명무실하게 무너져내렸고 이러한 혼란속에서 튀르크 족 일파가 [[카파도키아]] 지방에 [[룸 술탄국]]을 세우고 소아시아 서부해안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이런 위기 속에서 1081년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제국의 군제를 다시 바꾸어 유력 귀족군과 황제 자신의 사병을 바탕으로 직속 군대를 강화했고 유명무실해진 테마 제도를 대신할 군제를 개편했다. [[프로니아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바랑인 친위대]], [[아타나토이]][* 이름은 거창하고 기병화도 우수하긴 하지만 이 시기의 아타나토이는 만지케르트 전투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흩어졌던 지방군 테마타를 모아놓고 둘씩 싸움붙여서 이긴 병사들을 아타나토이라 부르고 있는 것 뿐이었다.]등의 강력한 호위병을 콘스탄티노플에 주둔시켰고 각지에서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비롯해 소아시아의 흑해 연안까지 타그마 정예병들을 징집했다.[* 이때 창설된 대표 부대가 [[아르콘토풀레]]다.] 요안니스 시대에는 파플라고니아, 킬리키아 등에서도 더욱 많은 병력을 포함시켰으며 [[페체네그]], [[세르비아]] 등 정복한 지역에서도 징발하여 정규군을 형성해 유럽과 아시아에 주군시켰다. [[투르코폴레스]] 궁기병 등을 포함해 정규군을 늘린 결과 동로마 군대는 1/3이 외국계 병력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고 궁병, 보병, 기병으로 나뉘어 합동작전을 발일 수 있게 조직되었다. 흔히 제국이 용병을 구입하고 본토 병력을 등한시하여 무너졌다는 이야기, 혹은 [[프로니아 제도]]를 통한 봉건화의 강화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나, 실상은 콤니노스 왕조 시기까지의 육군 주력은 아직까지 본토 로마인들이 주였다. 알렉시오스 황제의 시기까지만 해도 중앙군의 잔여가 제국에 남아있었으며, 그들이 문구에서 사라진 요안니스 2세의 시기에도 타그마 중심의 중앙군은 재편되어 건재하였다. 또한 용병을 '구입'하였다는 것도 일종의 오해인 것이, 제국은 병사로 징집할 외국인들을 '''정착'''시키거나 프로니아 제도로써 봉급을 주거나 하여 병력을 충원하였지, 대규모 용병으로 전쟁을 벌인것은 [[쿠만족]]을 끌어들인 [[레부니온 전투]]나, 급한 김에 1만의 튀르크 부대를 급구한 [[디라히온 공방전]] 등 뿐이었다. 이 경우도 외국에게 원조를 구한 것이지 돈주고 산 게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양판소식 용병 고용은 13세기의 [[니케아 제국]] 시기부터 등장한다. 이는 마치 로마가 제정 당시 보조병 부대를 둔 것 때문에 제국이 파탄났다고 보는 판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적어진 병력을 더 빠르게 투사하기 위해 폐지 위기에 처해진 해군을 강화시켰다. 그 전까지 해군은 각 해군 테마에서 징집되어오는 병력을 그대로 차용했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이 룸 술탄국에게 삼켜진 이후, 해군의 주요 항만이었던 [[스미르니]], 아틸레이아등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면서, 해군도 단일한 제국 해군으로 재편성된다. 이 동로마판 연합 함대의 사령관으로는 그 전까지의 해군 함대 사령관들인 메가스 드룽가리오스들보다 상위의 계급인 메가스 둑스를 두고, 그 직종을 그의 부제였던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맡겨 안정을 도모했다. 이 메가스 둑스는 각 테마타의 함대를 통합하여 지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통합 함대가 유지될 수 있도록 주둔지와 보급을 담당하는 펠로폰네소스, 헬라스 등지의 제국의 그리스 남부 속주 통치자 또한 겸했다.[* 고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대략 그 범위 이내로 좁혀진 말기로 가면 제국 전체의 행정과 보급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육군 부흥책과는 다르게 해군에 대한 투자는 [[알렉시오스 1세]] 당시에 바로 나타날 수 있는 성과가 아니었다. 제국 해군이 재건되는 동안 그는 노르만과 튀르크 함대에게 판정패를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런 부담은 아들 [[요안니스 2세]]에게로 그대로 전가되어, 그의 치세에 제국은 통상 특권 갱신을 요구하는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일수 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보두앵 2세]]를 구출하기 위해 전력을 투사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레스보스, 키오스, 로도스, 사모스, 안드로스 등의 섬들을 모두 석권하며 제국 해군을 능욕했다. 다행히도 당시의 베네치아가 이 섬들에 대한 지배권이 아닌, 무역 특권을 주장한 덕에, 통상 특권이 보장되자 제국에게 모든 섬들을 다시 돌려준 상황이었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제국은 속수무책으로 주요 섬들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요안니스 2세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에 그리스 남부와 콘스탄티노플에만 묶여있던 해군 보급, 주둔 담당을 크레타, 로도스 등의 에게해 주요 섬들까지 확장시켰다. 노력은 마누일 대제 시기에 빛을 발하여 당시 역사가들은 제국 해군이 최소 500척 이상의 크고 작은 전선들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2만명 정도의 해군을 보유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시기까지 왔다. 마누일 시기 제국은 십자군과 동반하여 파티마 왕조의 다미에타를 공격하고, 안티오키아 정벌전에 수륙 양면 군대를 파견하거나 1170년대에는 베네치아를 꺾기도 하는 등의 기염을 토했고 11세기엔 [[페체네그]], 셀주크에 정신 못 차리게 털렸는데 12세기엔 페체네그는 야전에서 전멸시키고 황제가 아나톨리아에 친정을 나가서 성과를 보았지만 이마저도 그리스 남부나 흑해에서의 제해권 장악 이상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구성된 콤니노스 군을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은 다시금 부흥을 꿈꾸었지만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 되었다. 훈련도와 무장도를 전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이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은 통치자에게 있었기에 매우 유능한 통치자가 지휘하지 않는다면 제국군대는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제국은 결국 강력한 지도력의 부재로 인해 안으로는 지방 대귀족들의 분열을 막지 못하고 밖으로는 [[제4차 십자군 원정|서방과의 불화]], 이슬람 세력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