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군 (문단 편집) === 제국의 황혼 ===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콤니노스 황조의 마지막 황제]]가 죽었을 때 동로마 제국군은 지극히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바뀌어 있었다. 그 동안의 개혁으로 제국군은 작고 효율적인 군대로 바뀌었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 역량은 아주 우수한 황제가 필요한 곳에 한정적으로 사용할 때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장군들은 황제만 바라보고 있었고 황제가 직접 지휘해야 움직이는 군대에서 지휘를 새로 맡게된 앙겔로스 왕조는 불행히도 유능한 황제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사키오스 2세가 똥볼을 차대는 사이, 외부의 위험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제국의 부유한 아나톨리아 해안지대는 튀르크인들의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되었고 서쪽에서는 세르비아와 헝가리가 달마티아와 시르미움을 집어삼켰다. 게다가 앙겔로스 황조의 과세정책은 제국에 편입되었던 불가리아 인들을 자극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그 결과 '''[[2차 불가리아 제국|불가리아 제국]]의 재림'''이라는 재앙이 제국에 닥쳐온다. 이렇게 주변 상황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앙겔로스 왕조의 황족들은 서로 싸우기에 바빴으며, 무능한 [[알렉시오스 4세]]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서 4차 십자군을 내전에 끌어들인 결과 급기야 '''[[제4차 십자군 원정|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함락당하고]]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해버리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터져버리고 만다.''' 이후 로마인들은 제국의 있던 자리에 망명 정권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였던 니케아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메소티니아와 파플라고니아를 중심으로 국력을 길러 126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미하일 8세]]가 간신히 상황을 진정 시킨 뒤에도 과거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미하일 8세]]의 치세에 제국은 사방에서 전쟁을 겪었고, 영토는 점점 줄어드는데 군비는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어 제국의 재정은 파탄에 이르게되었다. 이후 그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재정 파탄을 피하기 위해 군비를 대규모 감축하는데,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군대를 최소한으로 감축하였으며 해군은 아예 해체하고[* 이때 해고된 동로마 해병들은 튀르크계 공국들에 가담하거나 [[바르바리 해적]]이 되는 등 막장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제노바 공화국에 위임해버린다. [[미하일 8세]] 시절의 수만명에 달하던 군대는 완전히 공중분해되어 사라졌으며, 제국의 국운이 걸렸던 1302년의 아나톨리아 원정에서도 제국이 동원한 병력은 1만여명도 안되는 수준이였다. 나중에 안드로니코스 2세도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군을 재건하는데 힘썼으며, 그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3세]] 때는 다시 제대로 된 육군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군을 재건하는 것은 많은 돈과 시간을 요구했기에 완전히 복구되진 못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은 후에는 흑사병이 발발해 인적 자원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다 제국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제국군은 다시 증발해버린다. 이후에 [[요안니스 6세]]가 제국군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354년 요안니스 6세가 폐위되고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하면서 무산되고, 요안니스 5세의 치세에 제국군은 사실상 없다고봐도 무방할 수준까지 약화되었다. 15세기 무렵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카]], 펠로폰네소스 반도 정도의 영역으로 축소된 제국은 소수의 도시 수비군과 모레아군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전력을 베네치아 등의 믿기 힘든 몇몇 외국 용병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발전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되던 시점에 제국군의 수는 7,000명에 불과했고 그 중 수비대 사령관을 포함한 2,000명이 베네치아/제노바의 용병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