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군 (문단 편집) ==== [[타그마]](Tagma) ==== [[파일:Byzantine Tagma.png]] 복수형은 타그마타(Tagmata). 사실 타크마를 기병에 끼워넣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데, 이는 타그마가 병종이 아닌 '''기병 비율이 높은 중앙군''' 이기 때문. 타그마의 모집은 다양한 곳, 다양한 계층에서 실시했다. 초기에 타그마는 수도에 상비하며 제국의 기동전력을 담당하는 중앙군을 의미했지만, [[만지케르트 전투]]와 [[디라히온 공방전]]을 거치면서 절멸에 가깝게 피해를 입은 구 타그마들은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콤니노스 왕조 후기에 가면 대부분 콘스탄티노플 근교에 있던 타그마들은 마케도니아, 트라키아부터 일리리아, 모넴바시아 같은 유럽 방면, 니코메디아, 헤라클레이아 등의 아나톨리아 주변에서 모집된 기동성 높고 무장이 잘된 기병화 [[연대(군대)|연대]]를 의미하게 되었고, 위치도 꼭 수도에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알아둘 점은 지역'''에'''만 주둔하고 수세적 역할을 맡은 테마군과 후기 타그마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냥 지방에서 모았다는 것이지 지방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당시 역사가들은 에테리아, 아르콘토풀레 같은 단어보다는 그냥 '마케도니아 타그마' '트라키아 타그마'같이 부대명을 더 많이 언급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봉급이나 [[프로니아 제도|프로니아]]를 받는 직업군인이었다. 물론 전방으로 강제 정착된 세르비아계나 [[페체네그]]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알던 스콜라이, 아타나티, 엑스쿠비티, 베스티아리, 에테리아 등의 타그마들은 [[요안니스 4세]], 또는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까지는 등장하나, 그의 후계자 [[요안니스 2세]] 이후로 언급이 줄어들거나 재편된다. 쉽게 설명하면 * 스콜라이(Scholae)는 1068년 알레포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 종군했다는 기록이 마지막인 것으로 보아 이 전투 또는 3년뒤에 벌어진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궤멸한 것으로 보인다. * 엑스쿠비토레스/엑스쿠비티(Excubitores/Excubiti)는 [[디라히온 공방전]]의 참패 이후 전멸하여, 두번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 [[에테리아]](Hetaireia)는 외국인 부대로 이루어진 부대였고, 11세기 이후에도 살아남으나, [[알렉시오스 1세]] 이후 더이상 기존의 에테리아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기 에테리아는 군사 귀족들의 자제들이 기간병을 이루었다고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s-3|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서술한 기록이 있었다. 이 상태로 12세기까지 존속하다 군사적 의미가 사라졌으며 메가스 에테리아르키스(Megas hetairearches) 라는 직책은 가끔식 등장한다. * 불사자 아타나티(Immortals(athanatoi))는 완전히 해제돼서 [[알렉시오스 1세]]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남은 병력은 [[아르콘토풀레]](Archontopouloi)로 전입됐을 가능성이 있다. * [[바랑기아 친위대]]는 디라히온 전투에서 한번 패한 이후 재건되었다.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 붐이 끝물이라 북서유럽 여러 민족들을 다 받아준건 덤. *바실리키 에테리아의 역할은 아르콘토풀레라는 부대가 차지했다. 이는 귀족들의 전쟁고아나 장교들의 자제로 이루어진 중기병대였다. * [[페체네그족]], [[바랑인 친위대#s-1|바랑기]]등의 외국 근위대가 커진 만큼 로마인들이 차지하는 근위대를 통칭하는 바실리키 안트로피는 적어졌다. 그러나 아예 없어지진 않았다. * 가장 중요하게 후기로 갈수록 타그마(tagma)는 근위대, 중앙군이라는 개념보다 어느정도 전투력을 갖춘 ''연대''의 의미로, 옛 부대명보다는 징집지, 주둔지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