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명왕릉 (문단 편집) === 고려, 조선 기록 === >재위 19년째 가을 9월, 왕이 승하했다. 나이 40세였고 '''용산'''에 장례했다. 호하여 동명성왕이라 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 >재위하신 지가 19년 9월에 / 在位十九年九月 >하늘에 올라 다시 돌아오지 않으시니 / 升天不復迴雲輧 >성스러운 아들 유리[* 이승휴 주: 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잉태한 아들이다.]가 뒤를 잇고 / 聖子類利[* 이승휴 주: 在扶餘時, 婦所孕者.]來嗣位 >'''남기신 [[철편|옥편]] 장사지내어 봉분을 세웠도다.'''[* 이승휴 주: 지금(고려)의 '''용산묘'''다.] / 葬遺玉鞭成墳塋[* 이승휴 주: 今龍山墓也.] >----- >제왕운기 고구려기 > 東明王墓在府東南, 中和境龍山, 俗號珍珠墓. > 동명왕묘(東明王墓)가 있다. '''부(府)의 동남쪽 중화현(中和縣) 경계의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珍珠墓)라고 부른다. >又仁里坊有祠宇, 高麗以時降御押, 行祭, 朔望亦令其官, 行祭. 邑人至今有事輒禱. 世傳東明聖帝祠 >또 인리방(仁里坊)에 사우(祠宇)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御押)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사(무교)|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라 한다. >-----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연혁 > 東明王墓在府巽方三十里許中和境 龍山。 皆以畫班石營壙, 世云眞珠墓, 李承休記東明王事跡曰: "乘天不復回雲輧, 葬遺玉篇成墳塋。" 卽此也。 >동명왕묘(東明王墓)가 '''평양부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경내 용산(龍山)'''에 있다. 모두 화반석(畫班石)으로 광(壙)을 영조(營造)하였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이승휴가 동명왕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 가져다 무덤을 이루었다."한 것은 곧 이것이다. >又仁理坊有祠宇, 高麗以時降御押行祭, 朔望亦令其官行祭, 邑人至今有事輒禱, 古老傳云: "東明聖帝之祠也。 >또 인리방(仁理坊)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御押)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 · 보름에도 또한 그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邑人)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東明聖帝之祠)이라." 한다. >----- >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 東明王墓。在龍山。俗號眞珠墓。 >○世傳高句麗始祖常乘麒麟馬,奏事天上,年至四十,遂昇天不返。太子以所遺玉鞭葬於龍山,號東明聖王。詳見寧邊及成川。 >○李承休詩:“昇天不復回雲輧,葬遺玉鞭成墳塋。” > 동명왕 묘(東明王墓)는 '''용산(龍山)'''에 있는데 세상에서는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 세상에 전하기를, 고구려 시조가 항상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하늘에 일을 아뢰었는데 40에 이르러 결국 승천(昇天)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태자가 남긴 옥편을 용산에 묻어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 영변(寧邊) 편과 성천(成川)에 자세하다. >○ 이승휴의 시에, “승천한 구름수레[雲輧]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남긴 옥편을 묻어 분영(墳塋)을 이루었네.” 하였다. > -----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2 평안도 중화군 능묘 고구려 이후 고려의 기록부터 왕릉의 소재지가 졸본(홀본)에서 용산으로 바뀌어 나오며, 용산의 왕릉에서 제사가 지내졌다[* 또 왕이 승천했다는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이 시신이 없으니 왕이 남긴 옥 채찍을 대신 장례지냈다는 파생 설화가 생겼다.]. 조선은 고려의 기록과 제사를 그대로 물려 받았다. 고려시대엔 동명왕릉 외에도 동명성제사[* 인리방에 위치했던 고려시대 [[신사(무교)|신사(神祠)]]다.]가 있었는데, 민간에서 동명왕이 [[상제]]와 동급인 신으로 높혀진 것이다[* 이후 조선 세종이 동명왕과 단군의 합동 사당을 지었고, 이 사당에 세조가 [[숭령전]]이란 이름을 내렸다. 숭령전 건설 이후 동명성제사는 쇠퇴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