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성결혼 (문단 편집) === 고대~근대 === 고대의 [[결혼]] 제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결혼 제도와는 매우 동떨어진 제도였다. 당장 [[성경]]에서 등장하는 결혼의 종류들만 살펴봐도 주로 약혼 후 결혼, [[강간]] 후 [[강제결혼]](이 경우는 약혼 하지 않은 여자가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들에서 강간을 당했을 경우만 해당된다. 다른 상황은 무조건 처형.), [[매매]]결혼, [[일부다처제]], [[근친상간]](아버지의 토지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땅을 가지고 결혼하면 토지는 남편 가족의 소유로 분류된다-성경 속 이스라엘은 가족별로 토지를 구분짓는다)이 있다. 결혼을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으로 정의 짓는 것은 로마법이 처음으로, 로마법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서방 세계는 당연히 그 제도가 그대로 자리 잡았다. 다만 로마법도 자유인 남성과 자유인 여성이 결혼 계약의 당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 인구 절대다수였던 노예들은 결혼할 권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유인 여성은 말이 자유인이지 고대 로마서부터 근대 유럽까지 여성의 권리가 매우 취약했던 당시엔 여성이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근대의 결혼 제도의 이미지인 남성-여성의 결혼의 시작은 로마법을 기반으로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고 유럽에 뿌리를 내리면서부터이다. 4세기경에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콘스탄스]]가 공포했는데, 반대로 보면 그전까진 동성결혼이 존재했었단 뜻이다. 하지만 9세기에 비잔티움 황제가 동성 애인과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고[* 하지만 이것은 결혼이 아니라 의형제 결연식이었다는 시선도 있긴 하다.],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에선 지역 신부가 동성결혼을 주례해주기도 했다.[* 이 기록은 우연히 고문서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이다. 비잔티움 기록과 달리 이것은 진짜 동성결혼이다.] 12세기 아일랜드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아일랜드에서도 동성결혼이 존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근세]]를 거치면서 동성애를 억누르던 사회적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또한 가문 간 경쟁, [[정략결혼]], 활성화되는 경제와 잦은 전쟁에 따른 인구 필요 등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동성결혼에 대한 논의는 수면 위로 나올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