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성왕 (문단 편집) == 평가 == 전대의 [[삼근왕]]과는 대조적으로 전제군주라 할 정도로 주체적이고 고집있는 [[왕권강화]] 정책을 펼쳤다. 진씨 세력의 추대로 옹립된 왕이다보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왕권 강화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권세를 휘두르는 진씨[* 대성팔족중 상당수는 공주와 충남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 세력이며 4-5세기 무렵부터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 등장하는 마한계인 사씨, 연씨, 백씨가 있다.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남래(南來)귀족 세력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또한 대성팔족으로 이들은 온조의 십제 시절부터 온조와 동행한 세력으로 추정하며 한강일대의 경제권을 장악한 호족으로 파악된다. 다만 여기서 진씨는 온조를 따라 북쪽에서 내려온 것보다는 보통 한강 일대에서 온조 세력에게 연합해 지배층에 오른 마한 토착세력 출신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백제 초창기부터 분구묘 계통으로 대표되는 현지세력을 지배층으로 수용해 연합한 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금강]] 유역권을 지배 기반으로 삼았던 신진 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권력의 전면부에 배치시켰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세력으로 사씨, 연씨, 백씨 등 [[대성팔족]]이 있다. [[웅진]] 천도 이후 바닥까지 추락했던 백제의 부여씨 왕권과 국제적 위치를 정상 궤도에 안착시켜 백제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우호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개로왕]] 이후 끊겨버린 중국(특히 [[남조]])과의 관계를 되살렸고 [[신라]]의 [[소지 마립간]]에게 [[혼인]] 동맹을 제의하여 [[이찬]] 비지의 딸과 동성왕이 혼인하게 됨에 따라[* 비록 신라왕의 친딸인 고귀한 [[공주]]의 신분은 아니지만 이찬이라는 높은 신라 관등을 감안하면 비지 역시 신라 왕과 아주 밀접한 고위 종친일 가능성이 높다. 동성왕이나 소지 마립간에게 결혼 적령기의 딸이 없었기 때문에 종친의 딸을 대신 시집보낸 것으로 보이며 이런 사례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자주 있었다.] [[나제동맹]]의 결속을 굳건히 하는 등 적극적으로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말년에는 [[대신]]의 간언을 무시하며 성곽, 궁실, 정원 등을 과도하게 증축하고 향락에 빠지며 사냥에 지나칠 정도로 빠지는 등 과도한 왕권 강화 및 과시를 하며 백성에 대한 구제를 외면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고 이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원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