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아방송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external/dongne.donga.com/200910066451012w1-700x498.jpg]] * [[https://dbs.donga.com/history?p0=1|동아방송 17년사(동아일보 공식 홈페이지)]] *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viewOriginal.do?singleData=Y&archiveEventId=0051145805|동아방송 개국 관련 영상(국가기록원, 플러그인 설치 필요)]] [[파일:external/www.museum.seoul.kr/img_07_97.gif]] [[1970년대]] 중반경의 동아일보 사옥 모습(사진 오른쪽 귀퉁이). 지금은 없어진 송출탑이 보인다. 1963년 민간 신문사인 [[동아일보]]에 의해 개국된 민간 방송국이었지만, [[동양방송|TBC]]에 비교해봐도 전국구급[* 전국구라 해봤자 동양방송의 경우 TV는 수도권과 부산권, 라디오는 수도권과 호남권(광주, 군산), 영남권(대구)에만 방송되던 네트워크. 동양방송은 부산에 직할국을 세우고 호남권의 [[전일방송]], [[서해방송]], 영남권의 [[한국FM방송]]과 제휴했다.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시작한 [[MBC]]가 [[문화방송|서울 본사]]를 개국하고 [[문화방송 계열 지상파 방송사|지방 민영방송들]]을 계열화하며 단일 브랜드로 큰 것과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동양방송이 당시 TV방송국 가운데서는 정부 통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방송사였기 때문에(완전히 자유로웠다는건 아니다.) 동양방송에 전국방송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그렇다.]이 아닌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라디오 지역 방송에 불과했다. 전국구로 방송을 할 계획이나 TV 방송 개국 계획도 있었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야당지였기 때문에 번번히 퇴짜만 맞았다고 한다. 주파수는 AM 792kHz였다.[* 개국 당시 주파수는 1230kHz였으나 해당 주파수에 다이얼을 잡기 힘들고 외국 라디오 방송이 섞여나오는 혼선이 빚어지는 등 수신 상태가 나빴다. 결국 1966년 12월 4일부터 790kHz로 주파수를 변경했고 1975년 10월 국제전기통신연합이 라디오 주파수 간격 재배정을 결의한 이후 1978년 11월 23일부터 792kHz로 바뀌게 된다.] 동아일보사 광화문 사옥의 한켠을 빌려 스튜디오를 꾸렸으며 이 때문에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이후 스튜디오에 특수 고무판을 깔았다고 한다.[* 서울 1호선은 개착식으로 지어져서 심도가 얕았고 전철의 진동이 그대로 사옥으로 전해졌다! 특히 지하 1층 윤전기가 문제여서, 현재의 청계천 옆자리에 신사옥이 지어지기 전까지 근 20년간 동아일보가 충정로에 있었던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당시 송신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동아방송이 존속했던 시덜에는 [[영등포구]]였다.] [[개봉동]]에 있었으며, KBS로 넘어간 후에는 2010년에 폐쇄될 때까지 KBS 개봉송신소로 운용됐다. 개국 당시부터 [[BBC]]의 뉴스 시스템이던 '쿼터시스템'[* 라디오로 매 시각 15분마다 뉴스를 방송한다.]을 도입하여 서울권역에서는 나름 청취율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1965년 당시 KBS가 생까던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이 뉴스 시간을 이용해 15분마다 현장 중계차로 '''생중계'''하는 용자짓을 한 탓에, 박정희 정권에 제대로 찍힌다. 방송계 원로들 회고담에 따르면, 이 때문에 시범케이스 비스무레하게 해직기자 사태가 벌어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DBS는 생중계와 용자짓이 전문이던 방송 색채를 띠고 있었다.[* 소위 '조중동'으로 색채가 바뀌어 버린 지금도 보수 3사 중에서 제일 --돌직구-- 이빨을 심하게 까는 신문사가 동아일보다.] 이외에도 유명한 필화 사건으로는 1964년 소위 [[앵무새]] 사건이 있는데, '앵무새'는 당시 DBS의 논평 코너 제목이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377|#앵무새 사건의 상세 내용]] 이 일로 고재연 제작국장 등이 계엄하에서 구속되고 최창봉 부장을 비롯하여 직원 6명이 재판에 넘겨졌으나, 5년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웃 동아일보 기자들과 같이 '언론자유수호투쟁'에 동참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