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양척식주식회사 (문단 편집) == 역사 ==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인해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지 3년 후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토지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인도 제국]]을 식민지화했던 [[대영제국]]의 [[영국 동인도 회사|동인도 회사]]를 대놓고 본따서 세워진 회사이다. 이때면 일본은 거의 조선을 확실히 지배하는 것으로 굳혀졌으며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 식민지 개척회사를 세워서 이것저것 뜯어가려는 속셈을 갖고 만들었다. 1908년 [[일본 정부]]의 훈령 및 내각 의회의 승인 하에 따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통과되자 조선에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한 척식(拓殖) 사업하에 본 회사를 설립하였다. 본 회사는 조선이 식산(殖産)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에서 근면(勤勉)하고 농업에 전문성을 가진 농민을 육성하여 진보된 농법 전수와 식산사업에 이바지한다(...)는 듣기 좋은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조선의 농광산물 등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토지조사사업]]에서 토지를 직접 관리하거나 싼 값에 지주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직접 관리하는 토지의 소작인에게는 50%가 넘는 소작료를 부여했다. [[경술국치]] 이후 동척은 조선으로부터 출자받은 토지를 매입하고 국유지를 인수했으며 막대한 면적의 삼림지를 매입하였다. 삼림지는 임산물 개발에 쓰였고, 국유지를 포함한 농토는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이나 조선인 대지주 등에 불하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면서 [[1917년]] [[경성부]]에 있던 본사를 [[도쿄도|도쿄부]] 우치사이와이초(内幸町)로 이전하였다.[* 해당 건물은 패전 이후 한동안 일본 국세청이 사용하다가 [[1976년]]에 철거되고 [[1980년]]에 [[다이이치칸교은행]](현 [[미즈호 은행]])의 본사로 재건축되었다.] 침탈 구역을 확장하여 조선은 물론 [[중국]], [[대만]], [[내몽골]]-[[만주]], [[사할린]]-[[쿠릴 열도]], [[필리핀]], [[대영제국|영국령]] [[말레이 반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에서까지 척식 사업을 통해 경제 침탈과 물자 수탈을 잇따라 강행하였다. 1922년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장에서 조선인 소작농을 중심으로 생존권 투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동척은 이를 무시하고 [[한반도]]에 이민을 왔던 [[일본인]]들을 동원하여 총을 지급하고 투쟁을 진압한 바 있다. 이 때 [[1926년]] [[재령군|북률]] 출신이었던 [[나석주]] 의사(義士)가 [[경성부]]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다만 폭탄은 모두 불발에 그쳤고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폭탄 자체보다도 누군가가 과감히 식민지배의 중추 역할을 하는 기관을 공격한 그 자체가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야인시대]]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미와 경부]] 패거리와 교전하는 모습은 각색된 것에 가깝다.] 공기업이라 주가가 저평가되었을 뿐, 시가총액은 미쓰비시 등 거대재벌보다도 위라고 평가되던 초거대 기업이다. 단순히 뺏은 땅에서 소작 부리는 수준이 아니라 광공업, 제철, 철도, 금융, 유흥 등 여러 분야에 손을 댔고, 브라질이나 프랑스령 동인도에 투자하고 은행을 내는 등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