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이(드라마) (문단 편집) == 사실과 다른 점 == 이병훈 PD의 허준, 대장금, 서동요 등은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아 상상력이 동원되었지만 숙빈 최씨의 경우, 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사실과 다른 점이 상당하다. 또한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는 PD의 특성으로 [[숙종(조선)|숙종]], [[인현왕후]]와 [[서인]], [[노론]]을 선으로 설정하여 엄청난 미화를 [[희빈 장씨]]와 [[남인]]을 악인으로 설정하여 매우 많은 가상범죄를 지어냈다. * 숙빈 최씨의 수동적인 캐릭터로의 설정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제외하면 숙빈은 여태 모든 미디어 매체에서 꽤 천연덕스럽고 중전 다음가는 현숙한 여자로 그려진다. 또한 드라마에서 '''숙빈이 숙종에게,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고변한 사실'''은 무려 야사도 아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 있으나 이 부분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인현왕후가 폐비가 된 것이 희빈 장씨의 일파의 짓이라는 것을 알고 숙종에게 알리려다가 희빈 장씨와 장희재에 의한 암살미수로 인한 철저한 피해자로 그려진다. 다만 숙빈 최씨는 장희빈의 인현왕후의 저주에 대한 사실을 고변했을 때 후궁의 신분이었고 인현왕후는 중전이었는데다 전근대 사회에서 저주를 한다는 것은 살인을 하는 것과 동일하게 처벌할 정도로 금기시했고 저주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숙빈 최씨가 장희빈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변한 것은 인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왕의 정실부인인 중전을 저주한 후궁을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이 웃전을 기만한 것이므로 고변을 한 것은 인현왕후에게 공을 세우면 세운 것이지 인품적으로 흠 잡을 일은 아니다. 또한 [[숙빈 최씨]]는 [[숙종(조선)|숙종]]의 눈에 띄어 [[성관계|승은]]을 입었는데 기록에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여흥 민씨|사가]]에 나가서 살던 시절 [[인현왕후]]의 [[생일]]에 [[인현왕후]]를 모셨던 적이 있는 그녀가 [[인현왕후]]를 위한 기원을 올리고 있던 모습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숙종(조선)|숙종]]이 목격하는 바람에 눈에 띄게 되어 [[성관계|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이문정의 수문록) 숙빈 최씨에 대한 실록의 기록과 이문정의 수문록의 기록을 시간적 순서로 종합하면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중전이던 시기에 인현왕후를 모셨으며, 인현왕후가 폐비가 된 뒤에 숙종의 승은을 입었으며, 인현왕후가 사망한 이후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을 숙종에게 고변했으므로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위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를 한 사실을 고변한 것이므로 윗전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이지 그것이 수단이 악랄하다고 비판받을 사안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숙빈 최씨가 장희빈을 고변한 것에 대해서 아무도 희빈 장씨를 고변하지 못한 것을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에 대해 의리를 지켜 인현왕후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었다'''고 기록되었지 장희빈을 고변한 것에 대해서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드라마 동이에서 이러한 내용이 삭제된 이유는 야사 및 다른 드라마들에서 숙빈 최씨의 행동을 두고 정치적으로 장희빈을 제거하기 위해 술수를 부린 것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했기에 삭제된 것으로 보이며 가끔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면모가 아예 없지 않으나 그 모든 게 계략적이기보단 그저 주변 인물들이 꾸려주는 서사에 맞춰 수동적으로 움직인다는 특성을 보인다. * [[숙빈 최씨]]의 궁 입궐 계기 극중에서처럼 동이(숙빈)가 장악원의 노비 일을 하다가 감찰부의 궁인으로 승격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씨남정기(소설)에 의하면 숙빈이 어린 시절 인현왕후의 폐위를 안쓰러워하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밟혀 후궁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말 그대로 소설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흔히 궁중에서 [[무수리]]일을 하다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것이 전부이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실록에서도 숙빈 최씨의 신분에 대해서 기록된 것은 없다. 출신이 불분명하여 여러가지 설이 많은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였다가 국왕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영조]]가 말하기를 숙빈 최씨는 침방의 [[궁녀]]였다며 [[무수리]] 설을 부정했는데 [[영조]]의 [[컴플렉스]] 등을 생각해 보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침방 [[궁녀]]는 [[내명부]]에서 높은 편에 속하는데 지밀 [[궁녀]] 바로 다음이 침방 [[궁녀]]. 다만 실제로는 [[궁녀]]의 대부분이 [[천민]] 신분인 공[[노비]] 출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궁녀]]보다 낮은 [[무수리]]이거나 [[노비|천민]] 출생에 심지어 [[결혼|혼인]]을 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기혼녀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역사]]적 기록이 없어서 근거는 없다. [[무수리]]는 [[궁녀]]와 달리 궁에만 머물지 않고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불확실한 출신 신분 때문에 [[영조]] 즉위 후 [[영조]]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 있다는 [[소문]], 심지어 [[영조]]가 [[숙종(조선)|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고 [[영조]]가 이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영조]]는 [[숙종(조선)|숙종]]과 숙빈 최씨의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므로 [[후궁]] 첩지를 받은 후에 낳은 [[영조]]가 [[숙종(조선)|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영조]]의 [[이영수(1693)|친형]]은 [[요절]]했는데 그래서 [[영조]]가 숙빈 최씨의 차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 사극에서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가 [[성관계|승은]]을 입고 [[영조]](연잉군)를 낳아 빈으로 승급됐다고 묘사되나 사실 [[이영수(1693)|장남]]을 낳고 차남인 [[영조]]를 낳은 뒤 3남까지 낳았다. 그러나 [[영조]]의 위아래의 동복형제들이 모두 [[요절]]했다. 그나마 [[MBC]] 드라마 [[동이(드라마)|동이]]에서는 장남 [[이영수(1693)|영수]]를 낳았다가 영수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이에 비통해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 명성왕후 승하 시기와 사인 [[명성왕후]]는 1683년 12월 5일(이하 모두 음력)에 승하했고[* [[http://ko.wikipedia.org/wiki/%EB%AA%85%EC%84%B1%EC%99%95%ED%9B%84|#]] ] [[장희빈]]은 명성왕후 사후 3년상이 끝나고 나서 재입궁하며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원자(후일 경종)를 낳고 난 후 1689년 5월에 폐비된다. 헌데 드라마에서는 벌써 고인이 되신 대비가 멀쩡히 살아 있다.[* 이러한 고증 오류는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또한 명성왕후는 숙종의 두창을 고치기 위해 무당의 말을 듣고 치성드리고 한겨울에 찬물로 목욕한 후유증으로 [[폐렴]]으로 사망하게 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장희재가 독살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 가체문제 동이는 17~18세기 조선 숙종 시대가 배경인데 실제로는 첩지머리가 아닌 가체를 해야 맞다. 가체에서 첩지머리가 된것은 1756년(영조 32년)1월 16일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201016_002|#]]].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지금까지 여러 사극을 찍으면서 여성 출연진들이 가체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을 겪어온 이병훈 PD가 여성 출연자들을 배려하는 의미에서 사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첩지머리를 한 것.[[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164406592905944&DCD=A10102|#]] 사실 가체가 굉장히 무거워서 그 옛날 조선에서도 무거운 가체로 인해 목을 다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니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을 거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조실록에 가체를 한 여성이 가체가 무거워서 넘어졌는데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조가 가체는 비싸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데다 사대부의 여인들이 가체로 인해 쉽게 다치고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첩지머리로 바꾼다.] 게다가 이후의 사극들은 동이처럼 여성 출연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조선 전기 배경, 조선 후기 배경을 가리지 않고 가체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선 동이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상황. 다만 최근 중국 사극에서는 속이 빈 가벼운 가체가 개발되어 쓰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그런 빈 가체를 만들어 여성 출연진들도 배려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사실과 맞지 않은 점도 피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첩지머리가 가체보다 여배우의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것도 크다. 실제로 가체를 쓰는것이 첩지머리보다 더 이쁘고 잘 어울리는 배우는 [[양미경]]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별로 없는 편이다. KBS 사극인 공주의 남자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의도적으로 모든 출연 여배우들이 가체를 쓰지 않았고, 가체가 어울리는 여배우들 중에서도 [[김영애]]나 [[김혜수]]처럼 첩지머리 역시도 잘 어울리는 경우도 역시 있다.] * 호칭에 대한 문제 극중 연잉군을 나인들은 왕자마마, 숙빈 최씨는 왕자라 하거나 휘를 막 부르는데 정말 그랬다간 큰 문제가 생긴다. 후궁은 자기 소생이라 해도 왕손에게 휘를 부르거나 하대를 할 수 없다. 일단 왕족이든 뭐든 휘를 함부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큰 실례였던 사회다. 왕손들은 나자마자 품계를 초월한 신분이지만, 후궁은 높아봐야 정 1품이다. 또한 연잉군은 중전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서자이다. 왕의 적자는 대군, 왕의 서자는 군이므로 숙빈 최씨도, 나인들도 왕자 아기씨라 불러야 하며 보통 시간이 흘러 연잉군에 봉해지면서 연잉군 [[자가]]라고 불러야 한다.[* 마마는 극존칭 표현으로, 왕이나 왕비, 왕세자에게만 부를 수 있는 호칭이다. 물론 왕비를 거쳐간 왕대비나 대왕대비정도나 가능하며 자가(自家)는 조선시대 왕의 가까운 자손, 즉 왕자(대군, 군), 왕녀(공주, 옹주), 왕세자의 아들(군), 왕세자의 딸(군주, 현주), 혹은 후궁 무품빈 및 정1품 빈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일례로 조선 17대 국왕 [[효종(조선)]]의 후궁 [[안빈 이씨]]가 자녀인 [[숙녕옹주(효종)]]에게 "너"라고 칭했다가 죽이네 살리네 하는 걸 중전인 [[인선왕후]]의 중재로 넘어간 일이 있다. 그래서 안빈 이씨는 조선시대 후궁들은 자기 자식한테도 반말을 할 수 없다는 예시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 [[인현왕후]]의 죄목 인현왕후의 죄목은 칠거지악 중 자식이 없는 죄, [[희빈 장씨]]를 투기한 것, 죽은 [[명성왕후|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숙종(조선)|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숙종(조선)|왕]]의 [[강상죄|육체를 조롱한 죄]], 투기로 내전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 원자(경종)가 태어났을 때 노여워한 것, [[영빈 김씨]]가 퇴궁당할 때 위로하기는 커녕 재촉한 것 등이지, [[희빈 장씨]]와 [[남인]]이 모함을 한 것이 아니다. 또한 [[남인]] 역시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였다. 또한 인현왕후의 복위는 간신에게 모함당한 것이 아니라 삼불거의 규범에 따른 것이다. 인현왕후는 [[숙종(조선)|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의 상을 같이 치른 조강지처이므로 폐위의 처분은 가혹하다는 것에 따른 것이다. * [[희빈 장씨]]의 죄목 장희빈은 각종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인현왕후를 모함하지 않았으며 명성왕후를 독살하려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명성왕후는 희빈 장씨가 출궁되어 사가에 있던 시기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또한 왕세자의 고명을 받으려 '등록유초' 같은 접경지의 군사 기밀을 빼돌린 적도 없으며 숙빈 최씨나 연잉군을 죽이려고 든 적도 없었다. 이 드라마나 다른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장희빈의 대부분의 죄목은 허구이다. 또한 장희빈의 강등은 죄가 있어 폐위된 것이 아니라 삼불거의 규범에 따른 것이다. 삼불겨의 규범에서 쫓겨난 정실부인을 다시 들이면 새로 들인 정실부인은 친정으로 돌려보내거나 [[첩]]으로 강등시킨다. 즉, 인현왕후가 무죄라 복위된 것도 아니고, 희빈 장씨가 죄를 지어 강등된 것이 아니라, 국법을 따른 것이었다. 흔히 전왕비인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국모가 둘일 수 없으므로 국법의 우선순위에 따라 후궁으로 밀려난 것이라고 아는 이들이 있으나 삼불거의 규범은 조선의 모든 사대부들에게 적용되는 규범이었다. 또 희빈이 직접 나서 숙종에게 사약을 내려달라고 청한 적은 없으며 실제 죄목은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었다. * [[인현왕후]]의 [[안국동]] [[여흥 민씨|사가]]에서의 [[의식주]] 드라마 내에서 인현왕후는 [[폐후|폐서인]]이 되고 안국동 사가로 내처지는데 이때 머무는 곳이 초가집으로 나온다. 인현왕후는 폐서인이 된 뒤 친정본가로 돌아갔으며 초가집에 머물지는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폐비된 후 초가집에 머물며 지낸 왕비는 [[단종(조선)|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 송씨]]로 엄밀하게는 왕대비일 때 당시 상왕이던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함께 폐위되었으며 단종이 사사된 뒤에도 출가하지 않았고 지금의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경혜공주의 아들로 그녀에게는 시조카가 되는 정미수가 수양아들로 들어오면서 정미수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폐비된 왕비 대부분이 사가로 돌아갔기에 초가집에 머물지 않았으며 정순왕후 송씨가 유일하게 초가집에 머물었다. 그외로 초가집에 머문 폐비는 유일하게 [[광해군]]의 정비인 [[문성군부인|폐비 유씨]]로 자신의 남편인 광해군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가서 위리안치 되어 초가집에 머물었으며 폐위되어 유배된 지 7개월여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사가로 내처진 뒤 초가집에서 머물었다는 것은 인현왕후가 어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드라마의 허구. 또한 인현왕후가 소복을 입으며 식사도 채식 위주로 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역시 허구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서도 궁에서 폐비에게 의복과 음식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 그것도 자존심 있는 사대부가의 출신으로 [[왕비|중전]]이었다가 하루 아침에 폐서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죽느니만 못한 취급이었다. 이때문에 스트레스는 심했을 수는 있으나 의식주를 소박하게 초가집에서 머물었다는 것은 드라마의 허구이다. * 장렬왕후와 영빈 김씨와 명빈 박씨의 부재 언제나 장옥정의 편이 되어준 숙종 대의 대왕대비 장렬왕후, 숙빈과 마찬가지로 인현왕후를 많이 돕던 영빈 김씨, 숙종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 연령군의 어머니인 명빈 박씨 등 각종 주요 왕실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 조정 인물들의 변경 서인의 수장 송시열, 김수항, 남구만이나 남인의 수장 민암같은 인물들이 대다수 드라마상의 가상인물들로 변경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 주연 사극에서 왕실 최고어른이자 중요한 조연 중 하나인 대왕대비 [[장렬왕후]]는 아예 등장과 언급이 없다.[* 극중에서는 고증오류로 1688년에 명성왕후가 사망하는데 이는 1688년 사망한 장렬왕후의 포지션을 [[명성왕후]]가 같이 맡은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요 인물이자 조연인 [[장렬왕후]]를 생략하는 것은 이야기와 개연성에 있어서 영향력이 워낙 큰데다[* 그도 그럴게 장희빈은 처음에 장렬왕후의 궁녀였었던데다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을 주선해준 게 장렬왕후였기 때문이다.] 자체가 심각한 고증오류이기 때문에 동이 이외의 장희빈 주연 사극에선 무조건 등장하였고 실제로 동이 이후에 나온 장희빈 주연 사극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어찌보면 동이보다도 고증오류가 산더미지만 그래도 장렬왕후는 등장한다.] * 숙빈 아버지 최효원 사망시기 검계의 수장이었던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은 드라마내에서 동이가 10살 무렵에 죽는데 실제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은 검계의 수장도 아닐 뿐더러 1672년 숙빈이 세 살 때 사망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B5%9C%ED%9A%A8%EC%9B%90|#]] ] 그리고 [[검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검계는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천민들을 돕는 의적이 아닌 살인, 강도, 약탈, 부녀자 겁간 등 형사사건을 일으키는 요즘의 조직 폭력배나 다름없는 단순 악질 범죄집단이었고 [[영조]] 때까지 출몰해 영조의 어그로를 끌었다. * [[숙빈 최씨]]의 후궁 책봉 시기 드라마에서 숙원 첩지를 내리는 사람이 인현왕후로 나오는데 역시 사실과 다르다. 실제 숙빈이 숙원이 된 시기는 1693년 4월 26일로 당시 중전은 인현왕후가 아닌 장희빈이었다. 인현왕후는 당시 폐비였고 중전으로 복위된 때는 1694년 6월 1일이다. 드라마에서 동이는 연잉군과 입궁 후 숙의로 책봉되고 인현왕후 사후에 숙빈으로 책봉되나, 실제 숙빈은 인현왕후 복위 다음날인 1694년 6월 2일 숙의에 책봉되고 1695년 6월 8일 귀인에 진봉되고 1699년 10월 25일 단종대왕 복위를 축하하는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책봉. * 숙빈의 첫 아들 영수(永壽) 사망 시기 숙빈의 첫 아들이자 숙종의 셋째 아들인 영수(永壽) 왕자는 1693년 10월 6일 태어나 1693년 12월 13일 두 달만에 사망한다. * 숙빈의 둘째 아들 영조 탄생과 입궁시기 숙빈의 둘째 아들 [[영조]]는 1694년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검계 문제로 쫓겨났던 동이가 사가에서 연잉군을 출산하는 장면이 오류로 지적받는 이유가 이것. 그리고 연잉군이 7~8살쯤 입궁하여 봉작받고 동이도 숙원에서 숙의로 책봉되는데 실제 영조는 보경당에서 태어나 1699년 12월 24일 연잉군으로 봉해지고 19살이던 1712년 2월 12일에야 출합한다. * 숙빈 최씨의 중전 추대 드라마에서 숙종은 [[인현왕후]] 사후 숙빈을 중전 추대할 생각이 있었고 동이의 요청으로 후궁이 중전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선포하는데 실제로는 장희빈 사사 전날인 1701년 10월 7일 선포하였다. 또한 [[숙종(조선)|숙종]]은 숙빈을 중전에 올릴 생각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희빈 사후 숙빈에 대한 견제책으로 1702년 인원왕후와 가례를 올렸으며 내명부를 진봉하며 일신했고 숙빈은 궁이 아닌 숙빈방 이현궁에서 지내게 된다.[* 1704년(숙종 30년) 4월 1일 ,1711년(숙종 3년) 6월 22일 조선왕조실록 기록] 다만 숙종이 숙빈을 중전으로 책봉하겠다고 하자 숙빈이 그 말이 너무 황송하고 두려워 한겨울에 뜰에 엎드려 사양했다는 야사도 전해지고 있으므로 드라마는 이 야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인원왕후]]와 [[숙빈 최씨]]의 대립각 두 여인 둘 다 [[노론]]의 지지를 받는 쪽으로 같은 정치 성향을 기반으로 지지받고 있었기 때문에 후반부에 인원왕후와 숙빈 최씨가 대립하는 에피소드는 사실상 픽션 중에서도 배경조차 고려하지 않은 픽션에 가깝다. 실제로, 경종재위시 인원왕후 덕분에 연잉군이 왕세제가 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