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탁 (문단 편집) === [[동탁 토벌전]] === 그러나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삼국지)#s-1|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안 그래도 황건적이었던 [[곽태#s-2]](郭太) 등의 [[백파적]]이 봉기하여 그 규모만 자그마치 10여만 명이었는데, 반동탁 연합군까지 일어나자 동탁은 매우 난감해졌다. 동탁은 화풀이로 [[한복(삼국지)#s-1|한복]](韓馥), [[유대(삼국지)|유대]](劉岱), [[공주(삼국지)|공주]](孔伷), [[장막#s-2]](張邈) 등의 제후들을 천거했던 [[주비(삼국지)|주비]]와 [[오경(삼국지)#s-2|오경]], 원소의 숙부인 태부 [[원외]](袁畏)와 원술의 형인 태복(太僕) [[원기]](袁基) 두 집안 사람 50여 명을 잡아 죽였다. 반동탁 연합군은 막상 모여놓고서는 동탁을 치는 것을 꺼려 지지부진했다. [[조조]], [[포신]] 등이 그나마 동탁을 치러 나가봤지만, 동탁은 [[에이스]] 카드 [[서영(삼국지)|서영]]을 꺼내어 조조와 포신을 털어버렸다. 한편 [[손견]]도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고 [[원술]] 휘하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191년에 하남까지 이르렀으나, 손견도 서영에게 크게 패하고 간신히 군대를 수습하였다. 동탁은 손견을 마저 몰아내기 위해 [[호진]]과 [[여포]]를 파견해 손견이 있는 양인성을 공격했으나 호진과 여포 등의 반목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원술]]의 든든한 물자지원을 등에 업은 손견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도위 [[화웅]] 등이 전사했다. 참고로 당시 원술이 웅거한 [[남양]]군은 [[광무제]]가 그곳에서 거병한 이래, 성세에는 36개 현 약 36만 호 194만 명의 인구를 거느린 거대 권역이었다. 낙양이 있는 '''수도권''' 하남군이 성시에 22개 현 약 28만 호 174만 명이었으며, 당시 인구가 집중된 연주, 예주, 기주 '''주요 군국''' 인구가 최대 70만~120만 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웬만한 군국 2 ~ 3곳이 합쳐진 셈. 심지어 훗날 확인되는 촉한 전체의 인구가(서류상 누락된 인구가 있을 수도 있다고는 하나) 90만 정도였다. 훗날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 후 [[신예현|신야현]]을 포함한 남양군의 몇몇 현을 분리해 [[군(행정구역)|군]] 단위의 행정구역을 신설하였다. 동탁은 손견의 용진을 꺼려 [[이각]]을 보내 화친을 시도했지만 동탁을 증오하는 손견이 오히려 온갖 굴욕을 주며 동씨 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까지 하면서 이 화친제의를 거절했다. 손견과의 화친도 실패하자 동탁은 다시 손견과 싸웠지만 털리고 동탁은 손견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관동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 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나는 옛날에 주진(主神)과 같이 서정(西征)을 나섰는데, 서정은 변장과 한수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소. 내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로 주진의 뒤에 주둔케 하려 했는데, 장온이 듣지 않았소. 내가 이때 그 형세를 상언하였는데, 주진이 필히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소. 대각(臺閣 = 상서)에는 지금 (당시 일의) 본말(本末)이 있소. 일을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장온은 또한 나더러 선령(先零)의 모반한 강(羌)족들을 토벌하게 하여, 서방 지역을 일시에 소탕하려 하였소. 나는 모든 그 일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어, 마침내 일을 행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두어 보기 4천 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여 성세(聲勢)로 삼았소. 모반한 강족들이 곧바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을 끊고자 하기에, 내가 조금씩 공격하여 번번이 (길을) 소통시키니, 안정에 병사가 남아있음을 두려워했소. 오랑캐들은 안정에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정에 대해서만은 몰랐소. 이때 또한 소장을 올려 그 상황을 말하니, 손견은 주진을 행군을 따르면서 주진은 1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을 지으려 한다고 말하기에, 주진에게 2만 명으로 뒤에 주둔토록 하였소. 변장과 한수의 성중에는 묵을 곳이나 먹을 것이 없기에 응당 밖에서 운반하려 하지만, 주진의 대병(大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손견과 대전하지 못했고, 손견은 병사가 풍족하여 그 운반로를 끊고, 아이들을 써서 강족이 반드시 곡중(谷中)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니, 양주(凉州)는 혹 안정될 수 있었소. 장온은 이미 능히 나를 기용하지 못했고, 주진 또한 손견을 등용하지 못하여, 직접 금성을 공격하고 그 바깥담을 무너뜨려서, 말을 달려 장온에게 얘기하게 하여 나의 승리가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고 하니, 장온이 이때 또한 스스로 계획이 적중했다 여겼소. 아과(兒果)에게 건너가 규원(葵園)을 끊어버리니, 주진은 군수품을 버리고 달아나고 아과는 내 계책대로 되었소. 대각에서는 이것 때문에 나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했소. 손견이 좌군사마(佐軍司馬)가 된 것은 이를 보는 바가 남들도 같이 보았듯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 정사 오서 손견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