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동프로이센 (문단 편집) === [[독일 기사단국]] === ||[[파일:Oldprussian.png|width=100%]]|| 동프로이센은 본래 [[발트족]]이 살던 땅으로 이곳의 발트족은 [[고대 프로이센|'프루센' 또는 '고 프로이센인(prūsai)']]으로 불렸으며, 동쪽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함께 13세기에도 기독교화가 되지 않은 유럽의 몇 안되는 지역이었다.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가톨릭 세력은 여러차례에 걸쳐 선교와 개종을 위한 시도를 벌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1206년, 시토 수도회의 '올리바의 크리스티안'이 선교 활동을 벌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 1215년, 크리스티안은 신생 프로이센 주교구의 초대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원주민의 대대적인 적대행위에 직면하였다.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잔학 행위에 분노한 원주민은 폴란드 왕국의 헤움노, [[마조프셰]], [[포메른]] 등지를 공격하였다. 121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십자군]] 조직을 허락,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프로이센인의 침공을 일시적으로 막아낸다. 그러나 1223년, 대부분의 십자군이 철수[* 십자군은 대부분 '[[성지순례]] 왔습니다' or '이만큼 하느님을 위해 봉사했으니 됐다' 며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한 후 프로이센인들은 헤움노, 마조프셰를 또다시 침공하였고 마조프셰 공작은 남쪽의 [[프워츠크]]까지 도망쳐야 했다. 이러한 사태에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는 [[튜튼 기사단]][* 원래 [[예루살렘 왕국]]에서 활동하던 독일계 기사단으로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넘어간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의뢰를 받아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방어 및 개척을 담당하다 [[헝가리 왕국]]과 갈등을 빚자 교황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시도했다가 도리어 헝가리에서 쫓겨났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226년, [[튜튼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금인칙서#s-2.5|리미니의 금인칙서]]'를 통해 앞으로 기사단이 정복한 영토를 영지로 하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어서 교황과 콘라트 1세의 지지와 약속까지 얻어낸 기사단은 1230년부터 본격적인 프로이센 정복을 시작, 기독교화하기 시작하였다.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프로이센 십자군은 대규모 회전보다는 소규모 기동대의 정찰, 기습, 약탈, 철수 등의 유격전 위주로 벌어졌다. 십자군이 원주민 마을을 불태우고 주요 요충지를 점령하면 요새를 건축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원정을 계속하였다. 1241년까지 '포메사니아인(Pomesanians)', '포게사니아인(Pogesanians)', '바르미아인(Warmians)', '나탕기아인(Natangians)', '바르티아인(Bartians)'이 십자군에 정복되었다. 프로이센인들은 1242년 ~ 1249년의 봉기(1차 프로이센 봉기), 1260년 ~ 1274년의 봉기(대 프로이센 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프로이센 십자군은 1274년 '나드루비아인(Nadruvians)'을 정복하였으며, 결국 십자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써 동프로이센은 튜튼 기사단의 영지가 되었다. 기사단에 정복된 원주민들은 [[독일인]]으로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고, 17세기 ~ 18세기에 그들의 언어인 '고 프로이센어'도 사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