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프로이센 (문단 편집) ===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 === 프로이센 공국이 완전한 독립국이 된 것은 1657년으로,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았던 요한 지기스문트의 손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대홍수(역사)|대홍수]]로 [[스웨덴 제국|스웨덴]], [[루스 차르국]]과 전쟁하고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브롬베르크-벨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 공국에서 폴란드 국왕이 갖는 권리를 완전히 청산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3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에게 원군을 제공한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허락을 받아 [[프로이센 왕국]]을 선언하였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는 본토라 할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 [[베를린]]이 되었고, 기존의 프로이센 공국은 신생 [[프로이센 왕국]]의 동쪽 영토[* 브란덴부르크 기준으로는 동쪽 [[월경지]].]를 구성하게 되었다. [[대북방전쟁]] 당시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인 25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력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22px-German_Empire_-_Prussia_%281871%29.svg.png|width=500]]|| 1772년의 [[폴란드 분할 #s-2|1차 폴란드 분할]] 이후 [[서프로이센]]을 획득하여 월경지에서 벗어나 왕국 서쪽과 영토가 이어졌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괴멸당한 이후 [[쾨니히스베르크]]가 왕국의 [[임시수도]]가 되었고, 동프로이센은 잠시나마 왕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나 얼마 안가 베를린으로 환도했다. 1829년부터 1878년까지는 [[서프로이센]]과 함께 프로이센 주로 같은 행정 구역에 묶였으나, 이후 분리되었다. [[독일 제국]]이 선포된 후에도 동프로이센은 여전히 프로이센 왕국에 속하였고, 프로이센 왕국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는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프로이센 자체로는 중요성이 조금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이자 본체는 동프로이센이 아니라 호엔촐레른 왕가의 기반인 브란덴부르크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슐레지엔]]만 있으면 충분하고 동프로이센은 전쟁 나면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후의 [[빌헬름 1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빌헬름 2세]]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이어지는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지 [[프로이센 공국]]에서 이어지는 동프로이센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바이에른]], [[라인란트-팔츠|라인란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베스트팔렌]]과 같은 타 지역에게 발전에서 뒤쳐졌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은 보수성향의 귀족 출신의 지주 [[융커]]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이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 영지 경영에서 적극적인 이윤을 추구하였다. ~~응? 앞뒤가 다른데?~~[* 공업 발전이 안되니,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공업지역으로 떠나고 일손이 모자라서 농업이 흔들리는 악순환이 19세기 후반부터 [[나치 독일]]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얼핏 모순적인 것 같은 서술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프로이센의 융커 지주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토지 기반의 농업에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로 서부 독일의 상공업 기반 신흥 [[부르주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뒤쳐지게 되었다. 지주 계급인 융커의 이익은 상공업이 아니라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세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제국]]이 서구 열강들에 비해 낙후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토지 생산력에 기반한 전통적인 귀족과 지주들의 영향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 동시대의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역시 오스트리아가 자치권을 부여하며 폴란드 귀족, 지주들과 타협했기 때문에 산업화가 늦어지고 낙후된 지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포젠]]이랑 더불어 [[러시아 제국]]의 합병 목표로써 초기 [[동부전선]]의 주요 전장이 되는데,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전국적 영웅으로 떠오르는 [[타넨베르크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졌다.[* 타넨베르크 전투는 1410년에도 벌어졌는데, 이때의 전투는 독일 기사단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패배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룬발트 전투]] 참조.] 타넨베르크의 참패 이후 [[러시아 제국군]]은 동프로이센에서 쫓겨나 방어에 급급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가 독일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동원을 마치고 동프로이센을 침공해서 [[슐리펜 계획]]이 다 틀어졌다. 전략적으로만 따지면 동프로이센을 잠시 포기했다가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먼저 깨고 난 뒤, 러시아에게 전력을 집중해서 탈환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지만 동프로이센은 발트해와 폴란드 방면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였고, 또한 독일 제국 상층부를 장악한 융커들은 본거지인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이 위협받지 않기 위해서 동프로이센 방면을 우선적으로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수많은 예비병력들이 할당되어 동프로이센을 방어하는데 배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