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돤치루이 (문단 편집) === [[부원지쟁]]과 [[장훈복벽]] === 하지만 초기부터 돤치루이와 국회는 삐긋대는 경향이 있었다. 우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리위안훙이 계임하였을 때 돤치루이는 강경하게 1914년 중화민국 신약법 체제의 고수를 주장하였다. 이는 국회는 신약법 체제 하에서 그저 자문기관에 불과하지만 임시 약법 체제 하에서는 권한이 막강한데 국회에서 국민당의 세력이 강성하여 그의 권력을 크게 침해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방의 호국군이 일치하여 임시 약법 복구를 요구하고 펑궈장 등 다른 북양군벌들이 동조했으며 해군까지 독립을 선포하여 임시 약법 복구를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돤치루이는 6월 29일 국회와 임시약법 복구에 동의하면서도 미국 공사 라인쉬와의 대화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국회회복이 많은 이득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국회는 끊임없이 당파정쟁이 있을 것이고 행정간섭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국회와 자신이 충돌하게 되자 돤치루이는 "국회의 반대는 국가이익을 무시하는 것이다. 국회는 다만 당파의 이익만을 얻으려 한다."고 반감을 드러냈다. 여기에 약법 상의 대총통과 국무총리의 권한 해석 문제라거나, 너무도 강성해진 돤치루이의 세력에 대한 리위안훙과 국회의 견제,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성향 차이로 인하여 돤치루이와 리위안훙 사이에는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정쟁이 벌어졌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을 그저 결재기관 정도로 보고 무시했으며 그의 비서장 [[쉬수정]]도 리위안훙을 볼때마다 오만불손한 태도로 굴어 리위안훙을 분격하게 했다. 리위안훙도 이에 맞서 돤치루이의 권력 회수를 시도하고 계속 거부권을 발동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던 중 1917년 협상국이 중화민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종용하자 이를 환계의 세력확장과 남방 군벌 토벌의 기회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하여 대독절교안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국회가 대독선전안을 부결하고 리위안훙도 참전에 반대하자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했다가 5월 23일 해직당했고 국회는 외교총장 오정방을 국무총리에, 장사옥을 육군총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분노한 돤치루이는 [[장쉰]]과 손을 잡고 톈진에 임시정부와 임시국회를 소집, 안휘의 [[니쓰충]], 하남의 [[자오티]], 직예의 [[차오쿤]], 봉천의 [[장쭤린]], 섬서의 [[진수번]],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등에게 독립을 선포하게 하여 리위안훙을 타도하려 했지만 장쉰은 리위안훙의 부름을 받고 베이징에 가더니 1917년 7월 1일 난데없이 [[선통제]]를 복벽하는 [[장훈복벽]]을 일으켰다. 이에 리위안훙과 손을 잡고 7월 2일, 국무총리에 복귀,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을 토벌하고 장훈복벽을 취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