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돤치루이 (문단 편집) === 임시 집정으로 재기 ===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장쭤린]],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던 [[쑨원]]과 연합하여 다시 권좌 복귀를 꾀하며 반직삼각동맹을 체결했지만 여지없이 패배했다. 이후 [[강절전쟁]]으로 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나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북경정변]]으로 [[펑위샹]]이 [[차오쿤]]을 축출하고 베이징을 장악했으며 1924년 11월 15일 [[장쭤린]]과 [[펑위샹]]의 초청으로 임시 집정에 임명되어 다시 중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실권은 [[장쭤린]]에게 있었다.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베이징에 올라온 쑨원을 괄시하여 [[서산회의파]], [[궈쑹링]] 등의 비판을 받았고 쑨원의 국민회의에 대항하여 [[선후회의]]를 개최했다. 1926년의 [[대고구 사건]], [[3.18 시위]]로 입지가 좁아졌고 1926년 3월 27일 광저우 [[국민정부]]는 돤치루이 축출 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에 펑위샹이 그의 하야를 독촉하자 돤치루이는 4월 11일 동교민항으로 잠적하여 4월 20일 하야함으로 사실상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남은 생애 동안 불경 공부로 소일을 보냈다. 사실 권력욕은 대단했으나 그 외에는 술, 담배, 도박 등을 좋아하지 않아 사생활은 깨끗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여섯가지를 하지 않는다 하여 육불총리라 불리기도 했다. 퇴임 후 칭다오의 담산사 건립에 많은 기부금을 냈으며 장남 단굉업을 티베트로 보내 [[판첸 라마 9세]]와 만나게 하고 황금도장을 바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