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돤치루이 (문단 편집) === 말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단기서말년.jpg|width=100%]]}}} || || 말년의 돤치루이 || 이후 [[장제스]]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일으켜 북벌을 시작했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장쭤린]]의 [[봉천군벌]]을 물리치고 [[동북역치]]로 봉천군벌을 국민정부 산하로 귀속시키면서 [[북양군벌]]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어 돤치루이가 부활할 가능성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중국의 원로로서 어느 정도 존중을 받아 1933년 [[열하사변]]이 터졌을 때 조언을 하기 위해 장제스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그의 초청을 받아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권력자 시절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는 일본과 단절했다. [[일본 제국]]은 돤치루이를 화북 괴뢰정권의 수장으로 임명하기 위해 회유했으나 돤치루이는 거부했다. 1933년 [[관동군]] 부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우페이푸]], [[쑨촨팡]], 돤치루이 3인을 북양군벌의 우두머리로 규정, 이들을 매수하기 위해 육군성 기밀비를 동원하여 공작을 벌였으나 돤치루이는 요지부동이었다. 돤치루이는 오히려 5월 20일, 왕읍당, 육종여 등 친일파들에게 전보를 보내 이들에게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지 말 것을 준열하게 경고하였다. >나는 상하이에서 요양하며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현재 화북의 정세가 엄중한데 거짓 명목을 들어 궤도 외의 행동을 하는 것은 애국의 길이 아니다. 여러 아우들이 엄격하게 조사하여 지방 당국에 알려 엄하게 제지하기 바란다. 5월 8일에 있었던 [[장징야오]] 암살 사건 등이 겹치면서 일본의 군벌 회유 공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장제스의 배려로 상하이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이후 3차례나 장제스의 방문을 받는 등 사회 애국명사로 대접받았다. 1935년 11월, 중국 국민당 5차 전국대표대회는 돤치루이를 국민정부위원으로 선출하였으나 돤치루이는 취임하지 않고 은거 생활을 계속하였다. 1936년 11월 2일, 화북 상황에 대해서 걱정하던 중 병환이 악화되어 상하이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11월 3일, 행정원은 돤치루이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를 것을 결의하였으며 11월 5일, 전국에 조기를 게양하였다. 12월 9일, 영구가 베이핑으로 운송되었으며 와불사에 안치되었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 베이핑 서교에 매장되었다. 공산화 이후인 1963년, 돤치루이의 조카 단총강과 장사검이 돤치루이의 시신을 베이징 만안 공동묘지로 이장하면서 지금까지 그곳에 묻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