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돼지고기 (문단 편집) === 동아시아의 돼지고기 문화, 그리고 돼지의 역할 === 흔히 [[중국 요리]]에 돼지고기가 빠질 수 없고, 오래전부터 돼지를 애용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외로 명나라 이전의 전통적 중화문명에선 돼지고기는 천대받았고, 빈민들이나 먹던 식자재였다. 술과 고기 안주를 특별히 좋아했던 고명한 [[이태백]]은 닭고기, 오리고기, 거위고기, 소고기, 양고기, 그리고 아주 다양한 어종의 어육을 즐겼으나 절대 돼지고기만은 먹지 않았다. 과거급제자를 축하하는 연회인 소미연에서조차 소와 양, 닭, 노루, 메추리고기에 곱창 등 내장, 심지어 개구리 요리도 등장하나 돼지고기는 절대 내오지 않는게 상식이였다. [[소식(시인)|소동파]]는 본인의 시에서 진흙만큼 값이 싼 돼지고기, 부자는 먹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먹을 줄 모른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중원을 위시해서 동아시아로 퍼진 전통적인 돼지사육은 뒷간 밑에 돼지우리를 설치하는 형태로, 밑에 온갖 대변과 소변을 맞으면서 살고, 오물 투성이의 좁은 공간에 가둬 냄새가 다 배이는 형식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생관념이 적고 비위가 훨씬 덜 민감한 전근대인이어도 이는 역치를 시험하게 만들었던 일로, 단순히 감각과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갖 기생충과 인수공용 질병의 매개체로 기능하였고, 이는 전근대인조차 인과관계를 쉽게 관찰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에 악영향이 컸다. 그래서 전통 동아시아 의학에서 돼지고기가 건강에 매우 나쁘다는 인식이 뿌리깊었다.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최고봉인 [[손사막]](孫思邈)은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에 ‘돼지고기를 오래 먹으면 묵은 병이 나타날 수 있고 풍(風)이 생길 수 있다. 근육과 뼈에도 좋지 않다(凡猪肉久食,另人少子精,發宿病,豚肉久食,令人遍體筋肉,碎痛乏氣)’고 썼다. 』 당나라 때 문학가 한유(韓愈)는 ‘무릇 고기는 보양의 효능이 있으나 유독 돼지고기만은 없어 양생가(養生家)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凡肉皆補,惟豚肉無補,故養生家不食豚肉也)’라고 하였다. 명나라 때 본초학자 이시진(李時珍)은 저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돼지의 고기는 성질이 차고 맛이 쓰며 독이 약간 있어 혈맥이 닫히게 하고 근육과 뼈가 약해지고 허해지게 한다(凡猪肉苦味寒,有小毒.凡猪肉能閉血脈,弱筋骨.虛人肌.)’라고 기록하였다고 전해진다. 반면에 전근대 서양과 대부분의 지역과 시기엔 돼지들을 들판과 산림과 마을과 도시에 풀어두고 길렀다. 이는 두말할 필요없이 동아시아에 비해 훨씬 위생적인 방식이다. 들판의 도토리 등 온갖 열매와 구근, 버섯,소형 동물, 곤충 등을 먹고 자연에서 자란 깨끗한 외모와 향취를 가진 돼지는 다른 가축에 비해 위생적으로 꿀릴 바가 없었고 특히 이베리코 돼지고기는 고급으로 여겨진것에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서양에서도 생태계가 빈약한 도시에서 기르는 돼지일수록 분변의 비중이 높았고, 이는 서양의 공공위생 뿌리깊은 분변 처리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좁은 똥통에 갇혀 오물과 뒹굴고 몸에 벤 동아시아 돼지랑 통풍이 되는 넓직한 공공장소에 풀어두고 지내는 서양 돼지의 차이가 컸다. 더군다나 시골에서는 훨씬 위생적인 방식으로 키울 수 있었고... 그조차도 서양에서는 돼지가 유달리 더러운 동물이라고 비하하는 설화나 돼지를 빚댄 욕설 등 비하의식이 있던 것을 보자. 건조화-삼림전멸로 자연환경이 지리멸렬하고 관개농지에 의존하던 중동에서는 돼지를 방목을 해도 거의 분변을 먹고 살았으니, 괜히 유대교와 극초창기 유태인 출신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모두 돼지를 부당하게 불결한 동물으로 증오해 과도한 혐오를 해서 율법적으로 섭취를 금지까지 헀던게 아니다. 위생관념을 넘어서 결벽증이 있던 무함마드에겐 분변을 주식으로 삼는 돼지랑 개를 어떻게 보았을까? 인류 문화권 대다수에서 혐오할만한 사육방식을, 가장 극단적으로 실현했던 동아시아에서 당연히 인류 공통의 감성에 따라서 돼지고기를 혐오하고 천시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돼지고기의 향취는 매우 불량했고, 이를 덮기 위해 홍소육이나 [[동파육]]처럼 푹 쪄서 안쪽의 냄새를 빼고, 강렬한 간을 잔뜩 베어서 남은 냄새를 덮는 복잡한 조리법이 필요했다. 단지 미각만이 아니라 지난하고 복잡한 조리과정으로 온갖 병원체를 파괴해야만 했다. 당시 지배층과 기득권층이, 빈민들이나 먹던 돼지고기를 붙들고 어떻게 먹을지 조리법을 고민했을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여유있는 집안이라면 생존의 문제로 돼지고기를 멀리하고, 아사를 피해 억지로 먹는 빈민들은 복잡한 조리법을 개발할 재정적 여유가 없고, [[중국 요리]]의 돼지고기 요리 레시피는 [[소식(시인)|소동파]]나 [[금나라]], [[동하]][* 후술하겠지만 여진족 및 만주족 등 [[만주]]의 [[퉁구스]]계 제족들은 돼지고기를 즐겨먹었다.] 같은 예외가 아닌 이상 [[주원장]] 이후의 명나라와 청나라, 중화민국, 그리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때 나온 것이다. 그 이전 중원에선 공공위생과 질병방지를 위해 하수도의 역할과 음식물쓰레기장 역할을 기대한 것이고, 고기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전근대에는 아무리 상하수도를 반복해서 건설해봤자, 경제와 기술의 문제로 인구의 대대수는커녕 대도시 거주민의 수요에 유의미한 수준도 불가능한게 현실이다. 이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로마조차도, 극소수 대도시에서나 규모의 상하수도 설비가 있었고, 수도 로마정도에서야 상류층들에게 보편화됐지, 대다수 서민들이 사는 [[인술라]] 아파트에선 상하수도 설비가 없어, 중세유럽마냥 창문을 통해서 길가에 배설물을 버리고 살았다. 수도까지 그런데, 지방 대도시까지 가면.. 훨씬 열약했다. 즉 돼지는 전근대 상하수도 설비로 절대 유의미하게 커버될 수 없었던 배설물-쓰레기 처리 기능을 실질적으로 커버했던 생체정화조 - 바이오처리장으로, 물리적인 하수도 설비보다도 도시에 기여한 숨겨진 파츠였다. 이러한 생체정화조-바이오처리장의 기능을 극대화한게, 뒷간 밑의 똥통을 우리로 쓰고 가둬둬, 모든 사료를 집안의 분변-쓰레기로만 해결하게 만들고 심지어 가축용수마저 오줌처리로 땡쳤다. 굳이 바깥에 오물을 버려셔 도시에 질병을 퍼뜨리고, 또 그 돼지가 오물을 찾아다니면서 쏘아대는 과정을 효율적으로 만든것이다. 물론 이 방식에 단점이 없진 않다, 전근대 매우 부족할 수 밖에 없던 화장실 설비로 소유/사용가능 뒷간이 없어서 길가에 해결하거나, 소유 혹은 공동체 사용가능 뒷간이 있더라도 거기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길고 대기자가 많기에 길가에 급히 해결하는 배설물을 치울 돼지를 풀어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돼지가 다니면서 지리는 배설물의 문제도 있고, 돼지 스스로의 배설물은 잘 먹지 않고 도리어 체온을 떨어뜨리기 위해 잔뜩 뒹굴고 거리를 다니며 이를 흩뿌리고 간다는 점으로 상쇄된다.[* 뒷간에 가두는 형식이면, 돼지 배설물을 따로모아서 퇴비로 만들거나, 기르는 개에게 먹이면 처리가 간단하다.] 더군다나 동아시아는 개를 애용해서, 묶어두고 집을 지키는 마당견이 아닌 개는 풀어두고 길가의 분변을 청소하는 역할을 맡겼다. 즉 화장실 역할의 돼지랑, 공공장소 청소용인 개로 효율적으로 역할을 특화시켰기에 단점이 아닌 장점인 것이다. 이 형식의 진정한 단점은 워낙 오염된 환경에 밀폐되어 자라 살코기 부분까지 냄새가 배인다는 점과, 방목형보다 더 인수공용 질병과 기생충 문제가 심각해서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 복잡한 조리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먹지않고 버려진 동물의 내장이나 누에의 번데기와 같은 위치에 있던 것이다. 이러한 비위생적이고 역겨운 향취가 나고 건강에까지 나쁘단 인식이 박힌 돼지고기를 중국인이 즐겨 먹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명나라 이후이다. 잘 알려진 설화처럼 명나라의 건국시조인 [[주원장]]은 생존의 문제에 시달렸었고, 고아가 되어 같은 고향 출신 친구였던 탕화,[* 자신의 친구이자 주군이던 주원장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잃은 고아 출신이었지만 어머니의 언니 즉 이모에게 입양되어 부모 사망 후에 대신 맡아줄 친척이라고 하나도 없었던 주원장보다는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서달 등과 함께 유리걸식을 하거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며 살았다. 그 시절에 겨우 아사를 면하게 해줬던 돼지고기의 맛을 황제가 되어서도 결코 잊지 못하여 수라상에 자주 올리도록 요구하였고, 이때부터 돼지고기의 병원체를 효과적으로 파괴하고 역한 냄새를 빼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리법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고, 이는 황제의 수라상에 영향을 받은 명나라 상류계층의 식문화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더욱 돼지고기 선호에 불을 지핀 것은 만주족의 청나라다. 원래 말갈-여진-만주족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 그들은 돼지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진서 숙신씨의 기록에 따르면 "소나 양이 없으며,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입으며, 털을 짜서 포(布)를 만든다." 구당서 북적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가축은 돼지가 많아 부유한 집은 수백마리가 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지어 입는다."라고 할 정도로 가축 중에서 돼지를 매우 중시했다. 이는 광활한 냉대림에다가 돼지를 방목하고 살았던 전통을 공유했던 부여-고구려-발해의 예맥계통도 공유하던 유서깊은 만주-북한지방의 문화이다.[* 남한 지역, 특히 제주도로 갈수록 돼지의 크기가 작아지고 성장기간이 느려진다.] 부여의 건국 신화에서 돼지 우리에 버려진 갓난아이 동명이 돼지가 입김을 불어 따뜻하게 해서 살아남았다는 설화나, 저가(猪加)라고 부여의 관직명에 돼지를 붙이거나, 고구려의 제천의식에 돼지를 제물로 쓰고, 그 돼지를 관리하는 직책까지 주어졌고, 또 제물용 돼지를 쫒다가 좋은 터를 발견해서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다는 설화, 수도 남쪽에서는 봄의 제사를 위한 돼지를 기르는 관청, 북쪽에는 하지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설치되었다는 기록, 동천태왕의 이름이 교체(성 밖의 돼지)였던 점, 고구려의 요리인 맥적이 돼지고기를 사용하는 것이란 기록 등 부여나 고구려-발해에선 돼지가 매우 신성한 동물이었다. 송화강과 요하 안쪽의 예맥계 유적 발굴결과 가축의 뼈 대부분이 돼지의 뼈로 밝혀졌단 점에서 가장 흔한 가축이기도 했다. 이는 읍루-말갈-여진-만주족도 공유해서, 가장 흔한 가축으로 냉대림에 돼지를 방목하여 키웠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꼭 돼지제물을 바쳤다. 중원의 상류계층이 된 만주족과 그와 결합한 한족 상류층들의 돼지고기 요리 문화까지 합하니, 현대 중국요리에 돼지고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