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두두리 (문단 편집) == 개요 == [[豆]][[豆]][[里]]. [[삼국시대]]의 [[신라]]와 [[고려시대]]에 [[민간 신앙]]으로 믿던 목신(木神)이다. [[이두]] 표기로 두두을(豆豆乙)이라고도 불린다. '두둘'이 원형이고 '두두리'가 지소접미사 '-이'가 붙은 파생형일 수도 있고, '두두리'가 고전적 형태이고 '두둘'이 [[고대 한국어]]가 [[중세 한국어]]로 넘어갈 때 일어난 모음 탈락을 거친 형태일 수도 있으나 어느 쪽이 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주]] 남쪽 10리에 왕가수(王家藪)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서 목랑(木郞: 木神) 두두리를 제사 지냈다고 한다. 두두리 숭배의 시초는 [[비형랑]]이라고 한다. 비형랑 설화가 주로 기록된 [[삼국유사]]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신승동국여지승람에는 "비형랑 이래로 믿었다."라는 구절이 있어 두두리와 비형랑이 서로 연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주 출신이자 [[12세기]] [[고려]] [[무신정권]] 시절 제4대 집권자였던 [[이의민]]도 두두리를 숭배하여, 글 한 자 읽지 못하는 까막눈에 [[무당]]을 믿어서 집에 신당을 짓고 두두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두두리가 갑자기 통곡했다. 이의민이 놀라서 묻자 대답했다. >내가 지금까지 너([[이의민]])의 집을 잘 수호해 왔으나, 이제 하늘이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더 이상 너를 보호해 줄 수 없고 나도 의지할 곳이 없어져서 슬퍼서 운다. 얼마 후 이의민은 [[최충헌]] 형제에 의해 암살당했고, 관리들은 사당에 그려진 두두리 그림을 없애 버렸다고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종(고려)|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골 제국]] 원수 [[살리타이|철례탑]]이 [[고려]]를 공격해 왔을 때 경주에서 "목랑(두두리)의 말"이라면서 아뢰어 왔는데, '두두리가 적진에 적과 싸우러 와 있으니 병기와 말을 보내라.'하고는 충성심이 담긴 시 한 수도 지어 보냈다. [[최우]]가 이 말을 믿고 사적으로 병기와 인마를 그림으로 그려 내시 김지석을 시켜서 보내주었지만,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고 한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두두리는 신라부터 고려 중기까지 적어도 수백 년간 이어진 경주 지방의 토속신이었던 듯하지만, [[여몽전쟁]] 이후 경주가 한 차례 황폐화되면서 신앙공동체의 규모가 급감하다가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완전히 소멸한 것 같다. [[도깨비]]의 기원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