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두즉 (문단 편집) == 생애 == 두즉의 조상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귀순하여 양양(襄陽)에 살았고 자손들도 양양에 살았다. 두즉의 할아버지 두영계(杜靈啓)는 [[제(남조)|남제]]에서 급사중(給事中)을 지냈다. 두즉은 [[두회보]]의 7남으로 태어났다. 두즉은 어린 시절부터 기개가 있었고 고향에서 담력과 용맹으로 칭송받았다. 두즉은 표기부(驃騎府) 중병참군(中兵參軍)을 역임했으며, 상동왕(湘東王) [[효원제|소역]]이 형주(荊州)에 부임할 때 막하에 참여했고 뒤에 신흥(新興) 태수가 되었다. 549년, [[후경]]의 난으로 양나라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악양왕(岳陽王) [[소찰]]이 소역을 습격할 때 두즉은 소찰을 따랐다. 하지만 두즉은 소역과의 관계로 인해 몰래 소역에게 연락을 취했고, 형 두안(杜岸), 동생 두유안(杜幼安), 조카 두감(杜龕) 등과 함께 밤에 소역에게 귀순했다. 두즉은 소역에 의해 지절(持節), 신위장군(信威將軍), 무주(武州) 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선의장군(宣毅將軍)으로 전임되고 진만호군(鎭蠻護軍), 무릉(武陵) 내사를 겸임했으며, 지강현후(枝江縣侯)에 봉해져 식읍 1,000호를 받았다. 551년, 두즉은 소역의 명으로 왕승변을 따라 후경을 토벌하고자 종군하였다. 파릉(巴陵)에서 후경군의 공격을 받자, 두즉은 수십일 동안 방어에 전념했고 후경은 파릉을 점령하지 못한 채 결국 달아났다. 두즉은 시중(侍中), 좌위장군(左衛將軍)이 더해지고 작위가 공(公)으로 올라갔으며, 식읍 500호를 추가로 받았다. 552년, 두즉은 다시 왕승변을 따라 석두(石頭)까지 후경을 추적했고 횡령(橫嶺)에서 후경과 대치하였다. 후경이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자, 두즉은 횡령을 따라 후경의 부대를 가로막았다. 후경은 대패하여 진릉(晉陵)으로 달아났고 두즉은 석두성을 점령하였다. 후경은 자신의 찬탈을 목적으로 예장왕 [[소동(예장왕)|소동]]을 제위에 올렸다가 나중에 선양을 강요하여 소동을 회음왕(淮陰王)으로 강등시키고 다른 2명의 아우와 함께 유폐하였다. 이후 소동 형제는 후경으로부터 달아나 도중에 두즉을 만났고 두즉은 그들에게 채워진 족쇄와 수갑을 풀어주었다. 후경이 평정된 뒤 두즉은 산기상시(散騎常侍), 지절(持節), 독강주제군사(督江州諸軍事), 강주 자사가 더해졌고 식읍 1,000호를 추가로 받았다. 이후 [[북제]]의 장수 곽원건이 진군(秦郡)에서 진주(秦州) 자사 엄초원(嚴超遠)을 공격하자, 왕승변은 두즉에게 엄초원의 구원을 명했다. 이때 진패선도 구양(歐陽)에서 출병하여 두즉과 합류했고 사림(士林)에서 곽원건과 전투를 벌였다. 진패선이 강노병들에게 사격을 명하자, 두즉은 기회를 노리고 군대를 이끌어 북제의 병사 1만여 명을 참수하고 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곽원건은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여 달아났다. 한편 소역이 강릉에서 왕림을 사로잡은 뒤 왕림의 장사 육납(陸納) 등이 장사(長沙)에서 배반하자, 소역은 두즉과 왕승변에게 육납의 토벌을 명했다. 553년, 두즉은 차륜(車輪)에서 육납과 전투를 벌여 육납의 성채 2개를 함락하였으며, 육납이 장사로 달아나자 장사를 포위하였고 뒤에 육납의 항복을 받아냈다. 두즉은 다시 왕승변과 함께 협구(硤口)에서 무릉왕(武陵王) [[소기(무릉정헌왕)|소기]]를 토벌하였다. 두즉은 진으로 돌아간 뒤 병으로 죽어서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추증되고 무(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양(남조)/인물]][[분류:553년 사망]][[분류:경조 두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