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둔전(삼국지) (문단 편집) == 배경 == [[후한]] 말에 이르러 전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사회적 기반은 대부분 파괴되고 경제상황은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토지는 황무지로 변하고. 인구도 격감했다. 그 주요 원인은 전쟁을 피해 수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떠난 탓도 있지만, 때마침 발생한 오랜 가뭄과 전국을 휩쓴 전염병의 창궐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삼국지』 「무제기」[* 무제는 [[조조]]의 시호이다.]의 기록을 보자. >가뭄과 전란으로 양식은 바닥이 났다. 군벌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굶주린 사람들은 도적이 되어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배를 채우고 나면 남은 사람들을 버리고 사방을 떠돌았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생산기반이 급격히 와해되었다. [[원소(삼국지)|원소]]가 웅거하고 있던 하북에서조차 군인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뽕나무]]에서 [[버섯]]을 채취했다. [[원술]]이 웅거하고 있던 강과 회에서는 창포와 [[달팽이]]를 식량으로 삼기도 했다. [[식인|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자 각 주에서는 그것을 금지하라는 법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보다시피 달팽이를 먹을 뿐만이 아니라 식인을 할 정도의 상황에까지 이르었는데 조조가 관할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유리걸식을 하는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상황이 역시 상당한 정도로 악화되었다. 연주를 점거한 [[여포#s-1|여포]]와 싸울 당시에는 식량을 위해서 [[황소#s-3|황소]], [[하의#s-2|하의]], [[하만(삼국지)|하만]], [[유벽#s-1|유벽]]의 황건적을 공격해 식량을 충당했어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조는 여러 차례 군사행동을 펼쳤지만, 식량의 부족으로 더 이상 적극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심지어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연주(중국)|연주]]를 다시 찾았을 때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자, 당시에 수장령으로 있던 [[정욱]]은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현을 모두 뒤져서 3일치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사람의 시신으로 만든 육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정욱]]은 이때의 일로 두고두고 조조의 원망을 들었다. 사람의 고기로 만든 육포를 자신에게 먹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정욱이 공(公)이 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정욱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세설신어인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하자.] [[삼보의 난]]으로 인해 장안을 탈출 한 [[헌제]]를 영접하려고 조조가 서쪽으로 갔을 때에도 1천여 명의 장졸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 낙양에 들어가자 황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담장 사이에서 굶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