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루이드 (문단 편집) == 드루이드의 역사 == 드루이드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밝혀진 자료가 없다. 다만 기원전 청동기 시대쯤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최근 들어서 밝혀진 사실은 [[스톤헨지]]가 건설될 때 혹은 건설된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베리아인]]이 제물로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드루이드를 연구하는 이들은 영국에 많다. 특히 영국 웨일즈의 [[앵글시 섬]][* 로마 시대엔 라틴어로 모나(Mona)라고 불렀다.]이나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Iona)섬은 드루이드의 성지이자 양성 시설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들은 브리튼 군도가 단지 드루이드들 최후의 잔존 지역이었을 뿐임을 증명한다. 고대인들이 남긴 드루이드의 성소와 기념물은 거의 [[유럽]] 전역에서 발견된다. 특히 브리타니 지방과 [[프랑스]]에는 드루이드들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갈리아의 드루이드 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브리튼섬에서 왔다고 믿었다. 또한 아일랜드의 전승에 의하면 고대 아일랜드인들 역시 드루이드 교의 기원을 브리튼섬이라고 믿었다고 하므로, 브리튼 군도는 드루이드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대의 켈트 사회에서 드루이드는 지식과 지혜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재판관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고, 의학적, 약학적 지식 역시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의 기억력과 지식은 로마인들을 질리게 할 정도였으며, 그들의 지위는 왕들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들은 부족장이나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일반인들[* 평민들은 물론, 귀족과 왕족까지 포함.]은 그들을 숭배하고 따랐으며, 로마인들의 점령기에 저항 세력을 지휘했던 중심 세력도 드루이드들이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이들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들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은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이사르의 계획은 거의 성공했다. 앵걸시의 드루이드들은 완전히 전멸당했고, 이때부터 드루이디즘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로마의 군대가 지나가고 그리스도교가 유입될 무렵에 드루이드들은 아직 로마가 가한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히 새로운 종교의 전파는 매우 빨랐다. [[설상가상]], [[앵글로색슨]]족이 [[5세기]] 무렵 켈트족들을 마구 [[학살]]하자 [[7세기]]때에는 [[웨일즈]]와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드루이드교가 자취를 감추었다. 17세기에 '히무스산의 숲'이라 불리는 조직이 드루이드를 표방하며 결성되었다. 1858년 캘리포니아에서도 플레이스빌이라 불리는 미국 최초의 드루이드 조직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들은 드루이드를 포함한 켈트 전통이 단절된 지 천수백여 년이 지난 뒤 남은 드루이드의 '이미지'와 근대 서양 오컬트를 결합시켰을 뿐, 실질적으로는 과거 역사에 있었던 실제 드루이드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