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등자 (문단 편집) == 등자 대논쟁 == 등자의 도입과 기사 계급의 출현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는 논란이 있다. 일단 등자가 봉건주의 출현을 초래했다는 주장은 프린스턴과 스탠포드의 중세학과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린 타운젠트 화이트 주니어가 제기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은데, 등자가 기병 전력을 강화시켰지만 봉건주의를 낳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은 주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가령 동방에 [[기사(역사)|기사]]보다 천 년 전에 존재했었던 [[카타프락토이]]의 경우 매우 강한 돌격력을 발휘하였는데[* 다만 이들이 기사들을 능가하는 돌격력을 발휘했는지는 또 의문스럽다. 돌격 방식의 차이도 있고 이들의 마갑과 무장은 돌격 이후 백병전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이것은 동로마 제국의 카타프락토이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들의 주된 무장은 철퇴였고, 일부만이 기창으로 무장했다. 다만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을 보면 동로마보다도 고대 시기의 파르티아와 사산조의 카타프락토이들이 로마군 중보병 2~3명을 돌격 한 번에 꿰뚫어버렸다는 기록이 나오기에 이들의 돌격력 역시 기사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동로마와 같은 경우는 그저 이런 페르시아 계통 왕조들과는 다른 전술 스타일이라 봐야 할 듯.] 이들은 등자를 착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병에 대해 기병이 가지는 우위는 등자의 유무와 무관하게 발휘될 수 있으며, 봉건주의의 출현은 시류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린 화이트 주니어는 등자로 인하여 기병들이 '카우치드 랜스', 즉 겨드랑이 사이에 창을 끼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기병이 다수의 보병을 원활히 제압 가능했다지만, 등자의 발명과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 사이에 유의미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나아가 카우치드 랜스가 이전의 오버 핸드 차징[* 창을 머리 위로 들고 찍는 방식]이나 양손으로 창을 잡고 돌격하는 방식에 비하여 보병 전열을 수월히 분쇄 가능한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 논란은 의외로 심각하여 뚜렷이 결론짓지 못한 상태이다. 이를 '등자 대논쟁(Great Stirrup Controversy)'이라고 한다. 실험한 결과를 보면, 창을 들고 돌격하는 상황에서 등자가 기여하는 역할은 매우 적다고 하고 숙련된 기수라면 등자 없이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카우치드 랜스를 성공 가능하지만, '숙련되면'이라는 조건이 함정. 요점은 등자를 쓰면 그런 기마술의 고수가 아니라도 힘을 덜 들이고 랜스 차징을 할 수 있다는 거다. 기병끼리 말 위에서 칼을 들고 교전하는 상황에서도 등자는 분명한 안정성을 주며 장거리 이동에서도 기병에게 상당한 편의를 제공한다. 유럽에서 등자의 도입과 기사 계급 출현이 시기상 일치하므로 등자가 봉건주의의 출현에 기여하는 역할이 없다고 결론내리기는 쉽지 않다. 다만 카우치드 랜스가 전장을 주름잡던 시기 이전에[* 린 화이트는 서구권에서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 시기를 9세기까지 소급하지만 실제로 이 시기에 카우치드 랜스가 돌격전을 주도하는 지위를 차지했다고 간주할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는데, 9세기를 거치면서 바이킹과 마자르에 대항하면서 기사 계급은 확연히 성장해 간다.] 기사들이 주도하는 지위를 차지해 갔던 것도 사실이다. 즉 등자의 출현이 기사들의 전투력에 영향을 주었을지라도 봉건제 성립에 본질이 되는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애초에 보병의 쇠퇴와 기병의 성장은 로마제국 분열 이전부터 나타나던 경향이었다. 원래부터 기마민족이었던 게르만족이 대규모의 승마전사들을 꾸려 신출귀몰하게 노략질을 다녔던지라 보병 중심의 선방어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시절에는 일단 보병전사라도 말을 사서 타고 이동해야 적을 영격할 수 있었으므로, 허스칼을 기원으로 하는 부유한 고위 봉건전사계층의 등장 자체는 등자와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다만 고위 전사계층이 온전히 머릿수 대비 역대 최고의 전투효율을 자랑하며 바이킹과 마자르를 정면으로 대적할 수 있는 '기사'로 거듭난 데는 등자가 분명히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 시절 어린아이에게 승마를 가르칠 때 밧줄을 사용해 양 다리를 고정하는 원시적인 등자가 종종 사용되었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등자라고 보아야 하느냐는 논란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