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아도코이 (문단 편집) ==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페르디카스 VS 프톨레마이오스 == 최고 지위를 차지한 [[페르디카스]]는 권력욕이 심해져 아내와 이혼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였던 클레오파트라 공주와 재혼하려고 했는데, 그 이혼당한 아내가 [[안티파트로스(마케도니아)|안티파트로스]]의 딸이었으므로 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가 남몰래 손잡고 페르디카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BC 320년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대왕의 관을 마케도니아 아이가이(Aigai)의 왕실 묘지로 운구하던 페르디카스 측 군대를 습격하여 관을 탈취[*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정치 상징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보존 처리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은 황금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의 무덤을 도굴해서 부장품들과 황금관을 쓸었고 그의 시신은 유리관으로 옮겨진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궁전 속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참배한 기록이 있었으나, 서기 5세기 이후에는 자연재해로 신전이 바닷속으로 잠기는 바람에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서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구 [[소련]]이나 [[북한]] 등 공산권 국가에서 지도자의 시신을 [[엠버밍|영구보존처리]]하여 정치상징으로 써먹는 행위의 원조가 바로 이것이다. 즉, 훌륭한 [[시체팔이]].][* 알렉산드로스 3세는 생전에 이미 신격화된 존재였고 그가 묻히는 땅은 번성하리하는 신탁도 있었으며 그를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든다는 부가 효과도 있었다. 그리고 [[아르게아스 왕조]]의 초대 군주 페르디카스 1세가 아이가이에 왕가의 묘지를 만들라고 아들 아르가이오스에게 명하면서, 마케도니아의 모든 왕은 그곳에 묻혀야 하며 다른 곳에 묻힐 경우 왕조가 끝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어쨌든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아이가이에 묻히지 않았고, 아르게아스 왕조도 단절된다.]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페르디카스는 여러 번 대왕의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는 거절했다. 이는 페르디카스가 주도하는 제국통합을 반대한다는 뜻이었으므로 페르디카스는 이를 진압해야만 했다.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에우메네스]]가 페르디카스의 명에 따라 반란자들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공동 섭정 크라테로스를 '''[[헬레스폰토스]] 전투'''에서 죽이며 분전했지만,[* 이 대사건에 많은 마케도니아인들이 경악했다. 페르디카스조차 [[에우메네스]]가 크라테로스를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줄 것을 기대했을 정도다. 이 사실이 페르디카스에게 전해졌다면 암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왕의 시신을 되찾기 위하여 이집트로 쳐들어갔던 페르디카스가 [[나일 강]]을 건너는 데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다른 마음을 품은 부하들[* [[셀레우코스 1세|셀레우코스]], 페이톤, 안티게네스]에게 갑작스레 암살되면서 1차 디아도코이 전쟁은 제국통합파의 영수였던 페르디카스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트리파라데이소스(Triparadisus) 협정'''을 통해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새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되었으며 두 왕[* [[필리포스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은 마케도니아로 이송되었다. 사트라프 자리도 재분배되었는데, [[리시마코스]]가 [[트라키아]]를 받았고, 페르디카스 암살에 일조한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를, 페이톤이 [[메디아]]를, 안티게네스가 [[수사#s-2.1]] 일대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