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아도코이 (문단 편집) == 3왕국의 정립과 헬레니즘 시대의 끝 == [[파일:헬레니즘 터키.png]] [[입소스 전투]] 직후의 정세 입소스 전투 이후에는 주로 마케도니아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그리스로 돌아온 데메트리오스 1세는 재기를 노렸고, 카산드로스의 동생인 플레이스타르코스로부터 리키아와 킬리키아를 빼앗았다. BC 297년 카산드로스가 병으로 죽었고, 3년 후 BC 294년에 그 아들인 안티파트로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5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 5세가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가 알렉산드로스 5세를 죽이고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다. 안티파트로스 2세는 리시마코스에게 의탁했으나, 리시마코스는 오히려 안티파트로스 2세를 죽인 후 데메트리오스 1세와 협상해 그의 마케도니아 지배를 인정했다. 이로써 안티파트로스 왕조는 3대만에 멸망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가 마케도니아에 원정하는 틈을 타,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키프로스와 리키아를, 셀레우코스 1세는 킬리키아를 뺏어갔다. BC 287년, 데메트리오스 1세는 [[에피루스]]의 [[피로스 1세]]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도 쫓겨나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피로스는 마케도니아 지배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리시마코스에게 쫓겨났으며, 마침내 마케도니아는 리시마코스의 차지가 되었다. 쫓겨난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게 그리스와 테살리아를 맡기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패배하고 셀레우코스 1세의 포로가 되어 몇 년후에 죽었다. BC 283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는 큰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작은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있었는데, 후계 싸움에서 밀린 케라우노스가 리시마코스에게 의탁한 상태였기 때문에 필라델포스가 왕위에 올라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되었다. 그해, 리시마코스는 자기의 셋째 부인인 아르시노에의 말에 속아 첫째 부인 소생의 아들인 아가토클레스를 죽였고, 아가토클레스의 부인이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딸이었던 리산드라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로 도주했다. 셀레우코스 1세는 리시마코스 왕가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아들인 안티오코스를 내정 대리인으로 임명한 뒤 리시마코스를 공격하여 BC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그를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 이후 케라우노스는 승리자인 셀레우코스 1세 진영에 합류했으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1세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에 상륙했을 때, 케라우노스는 그를 암살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을 칭했다.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 1세가 모두 전사하며 권력의 공백이 생긴 마케도니아에서 리시마코스의 잔당들과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싸우던 도중[* 이는 나중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일대를 차지한 [[로마]]를 공격하는 명분이 된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리시마코스 왕조와 싸워 이겼기 때문에 그 영토인 트라키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정당한 전리품이라는 논리였다.], 마침 동방으로 대규모 이주하던 [[켈트]] 부족들이 그 힘의 공백을 틈타 마케도니아, 그리스, 아나톨리아로 쇄도해 왔다. BC 279년, 케라우노스는 이 전쟁에서 켈트 약탈자들에게 패배해 살해당했으며, 마케도니아는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군인들이 왕을 옹립하고 갈아치우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 그리스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 BC 277년 '''리시마케이아 전투'''에서 [[켈트]]인들을 몰아내고, 나머지 켈트인들이 아나톨리아 중부의 갈라티아에 정착하면서 마케도니아는 겨우 안정되었다.[* 몇몇은 이집트까지 내려가 [[용병]] 생활을 했다.] BC 272년 마케도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에피루스]]의 [[피로스 1세]]가 전사하면서[*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다른 적들과 싸우는 동안 [[피로스 1세]]는 [[이탈리아]]에 건너가 로마와 싸우고 있었다. BC 275년 [[피로스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베네벤툼 전투'''에서 패하고 [[에피루스]]로 철수한 피로스 1세는 BC 274년 '''아오오스 강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를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마케도니아를 제패했다. 하지만 BC 272년 [[스파르타]]의 왕을 갈아치워 그리스 폴리스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스파르타를 포위했다가, 스파르타의 격렬한 저항과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지원 때문에 실패하고, 이어지는 [[아르고스#s-2]] 시가전에서 안티고노스 2세에게 패해 전사하고 말았다. ~~[[피로스의 승리]] 패턴을 그대로 반복했다~~] 마케도니아는 확고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땅이 되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50년가량 계속되던 배틀로얄은 종료되고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라는 3왕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또한 이 3왕국에서 1세대('''디아도코이''') → 2세대('''에피고노이''')[* 디아도코이는 '''계승자''', 에피고노이는 '''후손'''을 뜻한다.]의 왕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안티고노스 왕조의 경우에는 3세대] 왕조 체제 역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파일:attachment/diadochi_275.png]] BC 275년경 3왕국의 판도. 이 지도에는 [[파르티아]] 영토가 표시되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때는 아르사케스 왕조가 파르티아를 차지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마우리아 왕조가 영조를 더 넒혔는데, 탁사실라 분파의 영역 확장이다. 이 세 왕국들을 보통 '''헬레니즘 왕조 혹은 계승자 국가(Successor States), 디아도코이 왕조 혹은 에피고노이 왕조라고 한다.''' * [[안티고노스 왕조]] * [[셀레우코스 왕조]]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래는 엄밀히 말하면 디아도코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후대에 성립된 헬레니즘 계열 왕조들이다. * [[폰토스 왕국]] * [[파르티아]] * [[페르가몬 왕국]] (아탈로스 왕조) *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 [[인도-그리스 왕국]] * [[비티니아 왕국]] * [[카파도키아 왕국]] * [[파플라고니아]] * [[갈라티아]] * [[아르메니아 왕국]] * [[콤마게네 왕국]] * [[소페네]] * 아트로파테네[* [[아제르바이잔]]의 전신] * [[하스몬 왕조]] * [[키레나이카]] [[파일:터키 포에니.png]] 기원전 218년, 로마가 막 성장할 무렵의 지중해 판도 그 후 이 디아도코이 제국들은 지중해 동부의 패권을 놓고 수세기 동안 각축전을 벌였지만, 이러한 혼란을 정리한 자는 동쪽이 아닌 서쪽에서 넘어왔다. 지중해 서부를 평정한 [[로마 공화국|로마]]가 동부로 세력을 뻗쳤기 때문.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를 시작으로 계승자 왕조들을 차례대로 정복해 나갔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마지막으로 모든 디아도코이 제국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한편 전성기 셀레우코스 제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메소포타미아 등 동방 영토는 [[파르티아]]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렇게 제2의 알렉산드로스를 목표로 한 수많은 실력자들이 군웅할거하던 디아도코이의 시대는, 로마와 파르티아라는 두 외세에 의해 막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