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딜리 (문단 편집) === 근현대 === 일본의 점령 후 딜리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따라서 시내에는 옛 건물이 거의 없다. 1945년 해방된 후 딜리는 점차 발전하여 1960년에는 인구가 7천에 이르렀다. 1975년 독립을 앞두고 벌어진 내전에서 딜리는 동티모르 민족해방군의 거점이었다가 8월 말엽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이 점령한 후 포르투갈측 총독이 도주하며 1차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해 12월 인도네시아 공수부대가 딜리를 기습 점령한 후 이듬해 동티모르 병합을 선포하였다. 이에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은 게릴라 투쟁애 나섰고, 주민들도 저항하였다. 1997년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뒤이은 경제 위기로 딜리를 중심으로 한 동티모르 전역에서는 시위가 벌어졌고, 인도네시아 군이 강경 진압에 나서며 국제적인 공분을 샀다. 1998년 민주화를 이룬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독립 투표를 약속하였는데, 투표일이 다가오던 1999년 9월 친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주둔군의 묵인 하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고, 이로써 145명의 사망자와 1만 2천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였다. (1999년 동티모르 위기) 이후 [[호주군]]을 필두로 하는 유엔군이 파견되었고, [[대한민국]]도 상록수부대를 딜리로 보냈다. 2002년 동티모르의 재독립 후에도 유엔 평화유지군은 계속 주둔하였다. 유엔 관할 하에 딜리의 인구는 2004년 기준 17만으로 늘었지만, 27%에 달하는 실업자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30세 이하 청년 실업률은 (남성만 따져도) 43%였고, 채용된 이들 중에서도 절반은 비정규직이었다] 딜리의 인군는 꾸준히 늘어 2018년 28만명을 기록하였다. 2021년 4월 대홍수로 시가지 대부분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