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땅굴/북한 (문단 편집) === 제2땅굴 === [[파일:IyOZgVY.jpg]] [youtube(hNF0ox-0K8A)] [[1975년]] [[3월 19일]]. 육군 [[제6보병사단]] 담당 구역에서 발견된 제2땅굴은 해외에서 수입한 현대식 굴착장비를 이용해 지표 45m 아래의 단단한 [[화강암]]을 뚫어놓은 것으로, 제1땅굴보다 규모가 더욱 컸다. [[철원군]] 북방 13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남쪽 출구는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1시간에 1만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차량ㆍ야포 등과 함께 [[전차]]까지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이다. 너비와 높이 2m, 길이 3.5km, 지하 50~160m. 한국군 및 주한미군 공병대와 미국 민간기술진까지 참여한 탐사팀은 3개월간 45개의 시추공을 뚫어 땅굴의 존재를 확인했다. 화강암 특성 상 내부에 빈 공간이 생길 수가 없는데 채굴한 시추석들이 일정하게 짧았던 것이다. 또 채굴 도중 모래가 나왔는데 강원도 산골에선 나올 수 없는 바다 모래였고, 화학실험을 해 보니 시추석들에서 전부 화약성분이 검출됐으니, 100%였다. 땅굴을 막기 위해 남측에서 땅굴의 허리 부분을 관통하는 역갱도 작업을 실시하여 땅굴의 좌측면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군에는 화강암을 굴착할 정도의 전문 장비가 없었으므로 [[현대건설]]의 도움을 받아 중장비들을 사용했다. 땅굴 내부에는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시간을 끌기 위해 쌓아놓은 벽이 총 3개 있었고, 이 돌들도 화강암이 아닌 밖에서 가져온 다른 지역의 돌이었다고 한다. 이 돌벽을 철거하던 도중 북한이 매설한 부비트랩을 건드려 1975년 [[4월 8일]] 국군장병 7명이 [[전사(죽음)|전사]]했다. 이후 [[5월 28일]]엔 또 1명의 전사자가 생겨 제2땅굴 수색 과정에서 총 8명이 희생당했다. [[http://cheorwon.grandculture.net/cheorwon/popup/multimedia/GC078P01943|현재 위령비가 있다.]] 북한군은 제1땅굴의 교훈인지는 몰라도 지난 번과 달리 철수까지 비교적 시간이 있었던 모양으로 자신들의 짓임을 감추기 위해 전기설비나 선로, 지지대 같은 자신들의 흔적을 최대한 없애고 도망갔다. 하지만 위의 기록영상이나 당시 참여한 사람들의 수기를 보면 미처 치우지 못한 지지대라던지 [[발파]]용 [[다이너마이트]]를 [[뇌관]]을 꽂아서 벽에 박아둔 채로 두고 가는 등, 마지막까지도 계속 굴착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철원군]]에서 운영하는 안보관광코스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반인도 볼 수 있다. 고석정에서 출발하는 코스와, [[백마고지역]]에서 출발하는 코스 [[https://www.dmz.go.kr/front/wantgo/tour_security/view/759|2가지가 있다]]. 둘 다 유명한 [[철원 노동당사]]와 [[월정리역]]이 코스에 들어 있다. 총 소요시간은 3시간 정도. 민간에 공개된 구간 끄트머리는 비무장지대 안쪽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간접적으로 비무장지대를 밟아볼 수 있는 셈이다. 보다 안쪽까지도 육군이 수색을 끝냈고 완전히 막혀 있지 않기 때문에 철문을 설치하고 경계병을 배치했으나, 근무자들의 심적 피로가 극심하고 기습공격 시 생존이 어렵기에 경계병을 철수시키고 무인감시장비들을 깔아 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