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땡전뉴스 (문단 편집) == 언론들의 행적 == || [[파일:스크린샷 2023-11-17 213623.png]] || || 당시 [[KBS]]에서 내보낸 땡전뉴스. 찬양문이 마치 북한의 [[조선중앙TV]]와 다를 게 없는 수준이다. || 실제로 [[전두환]]은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조선일보]] 부장급 기자 출신인 [[허문도]]를 공보 비서관에 임명하여 정책 홍보에 매우 요긴하게 써먹었고 자신의 해외 순방 때에도 몇 시간이나 방송 분량을 할양하여 생방송을 하게 하는 등 언론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였다.[* 참고로 [[허문도]]는 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어용 축제 [[국풍81]]을 기획·개최한다. 전두환의 군 출신 측근인 허삼수, 허화평과 함께 속칭 '3허'로 불리면서 전두환 정부 초기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권력 실세였다. 게다가 허삼수, 허화평과는 달리 전두환이 끝나갈 때까지도 권력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특히 각 방송국들은 전두환의 해외 순방 비디오를 개인 소장 용으로 따로 만들어 준다던지, 전두환이 애청했던 '[[수사반장(드라마)|수사반장]]' 등의 드라마 녹화 테이프를 손수 조공해 갖다 바치는 등의 행태를 보여[* 여담이지만 이후에 청와대에서 KBS로 이 자료를 이관했는데, 당시 방송 프로그램 보존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왜나하면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프로그램에 대해 자산이라는 생각이 없었던데다가 테이프 가격과 공간 문제로 인해 테이프를 여러 번 돌려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던데다가, 설사 보존을 한다 하더라도 주요 교양 프로그램이나 뉴스 프로그램 위주로 보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들은 자료가 별로 잘 남아있지 않은데 전두환은 TV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이 당시의 자료들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참고로 방송사에서 방송 자료를 전량 보존하기 시작했을 때가 1987~1988년도 무렵부터이고, 그 전의 방송 자료는 테이프 돌려 쓰기 때문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해당 사실은 1989년에 KBS 노조 측이 엮은 <5공하 KBS 방송기록>과 미디어 포커스 2편에서도 5공 당시의 방송 자료가 [[환상의 에피소드|여러가지 이유로]] 사라지는 일이 많았다고 언급하였는데 이 이관된 자료가 당시 멸실된 기록의 빈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는 멘트가 나왔다.], 이 시기 언론이 얼마나 권력에 굴종적인지를 보여주었다. 일명 '''각하만을 위한 다시 보기 서비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KBS1]] 미디어 포커스가 [[6월 항쟁]] 20주년 특집으로 만든 전두환 정권, 그리고 방송을 참조. 그리고 방송사에서 그것도 모자랐는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예 '''정권홍보성 편파드라마'''를 15번에 걸쳐서 방영했다. 심지어 [[6.29 선언]]과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치른 이후에도 1988년 2월 24일 전두환 퇴임 직전 보도국에서 제작하여 [[KBS1]]에서 '역사를 세운 큰 약속 단임의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MBC]]에서는 '인간 전두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마지막까지 충성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KBS의 방만한 경영 태도와 가뜩이나 심각한 양 방송사의 편파 보도에 불만을 가진 시청자들을 분노시켜 결국 남부 지방의 농촌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던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된다. 2010년대에도 [[KBS 뉴스 9]]이 일일연속극과 연계 효과에 힘입어서 상당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도 1TV에서 광고하던 시절이었음에도 일일연속극과 KBS 뉴스 9 사이에 광고 한편 편성하지 않았어도 신뢰도 문제 때문에 시청률에서 만년 2~3등을 오가는 신세였다. 사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이를 막기 위해서 대도시 지역에서도 통합 [[공과금]]제를 도입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편파 보도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KBS도 광고 방송을 하고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었다. 신문사에서 [[전두환]]을 비판할 수 없어 TV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을 대신 까던 게 당대 풍토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면서 학생시위나 파업 등 민주화 운동을 '사회 불안 현상'으로 편파 보도하는 건 물론이요,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사회 실태도 다루지 않았다. [[애니메이션]]도 대부분 외제로 채운 점[*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엔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폭력물 추방]]의 여파 때문인지 명랑물이 SF보다 우위를 점했다.],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외국 드라마도 상당수 편성했던 점 등은 '''엄연한 사실이었던지라'''[* 그러나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 8월에 국보위가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폭력 프로그램 편성 금지 정책을 만들어서 단속하긴 했지만, 대중들의 욕망 때문인지 결국 실효를 보지 못했다.], 반 정부적인 색채를 띠긴 해도 대놓고 잡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KBS가 여전히(정확하게는 1988년 상반기까지) 편파적으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시청료 징수율이 50% 밑으로까지 떨어졌다. 결국 1984년 1,255억 원으로 피크를 찍었던 KBS 시청료 수입은 1987년에 1,000억 원선을 밑돌았고, 1988년 789억 원으로 급감했으며 반대로 올림픽, 3저 호황의 영향으로 광고 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1980년대 후반 KBS의 재원구조는 상업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급속히 상업화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텔레비전]] [[수신료]]가 2,500원으로 동결되는데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과 [[1987년 노동자 대투쟁|노동자 대투쟁]] 후 MBC를 시초로 각 방송사에 노동조합이 속속들이 결성돼 방송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1988년 8월에 MBC 노조가 방송사상 첫 파업을 벌여 [[황선필(언론인)|황선필]] 사장을 쫓아내 방송민주화 진전의 기반을 다졌고, [[1988 서울 올림픽]] 직후 시민운동가 출신 [[서영훈]]이 KBS 사장으로 부임했으며, MBC도 새로 출범한 [[방송문화진흥회]]가 대주주 자리에 올랐다. 1989년에는 단체협약 결렬로 MBC 노조가 또 파업을 벌여 보도-편성-TV기술국장의 3배수 추천제 등 5개 조항을 관철시켰다. 양 방송사에서 진보적인 젊은 기자들에 의해 <어머니의 노래>와 <광주는 말한다> 같이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들은 물론, <뉴스비전 동서남북> 같이 정치권을 겨냥한 사회고발 프로그램들도 같이 제작돼 한동안은 방송 민주화, 제작 자율화 바람이 불어 [[공영방송]]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듯 싶었다. 위와 같이 과거 흑역사를 스스로 반성하는 듯한 방송도 나오고 해서 시청자들이 이제 정신 차렸구나 싶었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초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자 서영훈 사장은 특근수당 변칙지출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이에 항의해서 벌어진 파업이 이른바 1990년을 풍미한 [[KBS 사태]]다. 이 파업은 타 방송사 노조까지 합세해 방송민주화 쟁취운동으로 이어졌으나 정권의 탄압과 언론의 편파보도 등으로 실패했다. 그를 대신해 새로 부임한 [[서기원]] 사장 아래 이전처럼 특정 정권에 기생하는 국영방송과 같은 행보를 보이면서 공영방송으로서의 명분을 다시 상실하기에 이르렀고, [[최창봉]] MBC 사장도 3당 합당과 KBS 사태 등의 영향으로 태도가 바뀌어 <[[PD수첩]]>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불방, 안성일 노조위원장 해고, 1991년 드라마 <[[땅(드라마)|땅]]>의 조기종영 등으로 정권 눈치보기에 열을 올렸다. 같은 해에는 노조의 제작 관련 3개국장 추천제 폐지를 시도하려 하자 1992년의 50일 총파업으로 번지기도 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후 KBS에선 홍두표 사장이 취임하여 보도국에 대대적인 쇄신을 가하고 1TV 광고를 폐지하고 나서야 겨우 나아졌으나, 1995년 2월 7일 민자당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김영삼 대통령 동정을 헤드라인으로 틀어 5공 시절로 회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과거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 시청자들이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가장 큰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기형적 재무구조, 비효율적인 인건비 지출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땡전뉴스를 비롯한 '정권에 기생하는 더러운 놈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가장 결정타로 작용하고 있다. 웬만한 시청자들은 이런 전력이 있는 방송사를 믿을 리가 없으니 "내가 뭘 믿고 니들한테 돈을 더 줘?", "그렇게 돈이 부족하다면 1TV 광고를 다시 하면 될 거 아냐?"라는 논리로 나오면, KBS 측은 반박할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 의외지만 한동안 MBC에서 땡전뉴스를 방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이는 1982년 6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직에서 [[문화방송]]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웅희(정치인)|이웅희]]가 전두환에게 TV뉴스 맨 앞에 항상 대통령이 나가는 걸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전두환에게 설득했는데 의외로 전두환도 이에 수긍은 해서 MBC에서 땡전뉴스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웅희가 MBC에서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을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땡전뉴스만 없앴을 뿐, 대신 연말특집 프로그램 등을 활용해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문화통치]]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1년 정도가 지난 1983년 경, 참모진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뀐 전두환은 이웅희를 부른 다음에 열심히 갈궜고 '''결국 MBC에서 다시 땡전뉴스가 나오게 되었다.'''[* 참고: 한국대중매체사 563p, [[강준만]] 저. 이는 전두환의 취향에 이웅희의 곡선적이고 다소곳한 스타일보다 [[이원홍(1929)|이원홍]], [[이진희(1932)|이진희]] 등의 직선적이고 호탕한 스타일이 맞았던 것일 뿐이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KBS 2TV]]에선 1TV에서 방영되는 땡전뉴스와 시간대가 겹치던 "생방송 오늘"[* 방영 시간은 평일 20:50~21:25. 지금의 [[2TV 생생정보]]와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이다.]이 땡전뉴스를 피하려던 시청자들 덕분에 시청률이 높게 나왔는데[* 다만 당시 시청률 조사 방식이 지금처럼 피플미터식은 아니고 전화, 설문조사 형식이었다는 건 감안하자. 그렇다고 땡전뉴스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9시 정각에 뉴스센터를 연결하고 땡전뉴스가 포함된 간추린 소식 코너를 내보냈다.] 당시 윗선에서 2번째 꼭지 부분을 재미 없게 해달라는 요구에 진짜로 2번째 꼭지 부분을 일부러 재미없게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래도 시청률이 높게 나오자 1987년 상반기에 아예 폐지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뭐,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던 시기였으니... 다만 의외로 [[일요일]] 만큼은 땡전뉴스가 잘 방영되지는 않았는데[* 간간히 땡전뉴스를 앞 부분에 편성한 적은 있다. 그래도 평일에 비하면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 이때 KBS와 MBC에서 평일 뉴스와 별개로 [[심층 뉴스]] 프로그램[* 이 중 [[뉴스파노라마(KBS 1TV)|뉴스파노라마]]는 뉴스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시사 프로그램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한데, 사회 고발적인 성격은 약했고 계몽적인 성격이나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강했다.]인 [[뉴스파노라마(KBS 1TV)|뉴스파노라마]]와 [[MBC 뉴스센터]]를 편성했기 때문. 하지만 충성 경쟁은 어쩔 수 없었는지 1984년 가을에 MBC에서 뉴스센터를 [[MBC 뉴스데스크]]로 통합시켰고, 동시기 KBS1에선 뉴스파노라마를 8시로 옮기고 기존 뉴스파노라마가 편성되던 시간대에 [[KBS 뉴스센터 9]]를 방영한 바 있다. 다만 KBS에서는 1986년에 어찌된 모양인지 몰라도 다시 뉴스 파노라마를 복구시켜 놨다가 이듬해인 1987년 초에 폐지. 그러나 MBC에서 방영된 뉴스센터는 전두환 집권 기간이 끝난 1989년 5월 말이 되어서야 부활했지만 1989년 당시의 뉴스센터는 포맷이 심층 뉴스 프로그램 위주가 아닌 일반적인 [[종합뉴스]]([[메인 뉴스]]) 프로그램으로 방영하였으며, 11월 중순에 잠깐 사라졌다가, 1991년 4월 ~ 1993년 10월까지 일요일마다 MBC 뉴스센터라는 같은 타이틀로 방영하다가 1993년 10월 중순에 다시 뉴스데스크로 통합했다. 후일담 아닌 후일담으로 [[KBS 뉴스 9]](1988년 3월부터 1996년 11월까지)와 MBC 뉴스데스크(1988년 4월 중순부터 1996년 9월까지)에선 [[주요 뉴스]]를 보내지 않고 바로 본 방송을 시작했고[* 다만 프로그램 예고를 내보내긴 했고, 1991년 MBC 뉴스센터도 주요 뉴스를 편성하고 나서 본 방송을 시작했으나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흑역사]]化... 다만 [[KBS 일요 9]], [[KBS 9 일요현장]], [[KBS 뉴스 9|KBS 뉴스 9 일요와이드]]에서는 멀쩡히 헤드라인을 보냈기는 했다. 1992년에 [[KBS 9시 뉴스]]에서 다시금 헤드라인 부분이 부활하기는 했지만 얼마 못갔다.] [[SBS]]도 비슷하게 평일 [[메인 뉴스]]도 마찬가지로 주요 뉴스를 내보내지 않고 바로 본방송을 시작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그래서 당시 KBS 뉴스 9와 MBC 뉴스데스크 자료를 보면 "[[헤드라인 뉴스|오늘의 주요 뉴스]]" 부분이 없었던 것.[* 다만 본방 시작 직후에 앵커가 주요 소식 요약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현재도 [[KBS 뉴스 5]]나 중국 [[중국 중앙 텔레비전|CCTV]]의 [[신문연파]]에서도 방송 시작 직후에 앵커가 이런 식으로 주요 소식 요약을 한다. 참고로 당시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시사 프로그램들 자료를 보면(예시: [[뉴스비전 동서남북]], [[기동취재 현장]], [[시사매거진 2580]]) 프로그램 맨 앞 부분에 [[헤드라인 뉴스|헤드라인]]을 보내고, 그 다음에 광고를 내보낸 다음에(KBS1 시사 프로그램은 해당되지 않는다.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과 특집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몇 번의 블록 광고를 제외하고 광고 편성을 안했다.) 본방을 시작했다.] 후발 주자인 SBS는 1994년부터 [[KBS 뉴스비전]]과의 경쟁으로 주요 뉴스 부분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개편 때마다 사라졌다 재도입되었다를 반복하다 1997년 5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과거 땡전뉴스를 주도하거나 가담했던 언론 부역자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반성 없이 방송사나 언론계 곳곳에서 '선배'나 '원로' 대접을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당장 땡전뉴스를 만들면서 KBS 보도본부 데스크를 지켰던 강용식이나 박성범[* 그나마 박성범은 KBS에 대해 반성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해 당시 심정을 밝히면서 사실상 땡전뉴스를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같은 사람들은 국회의원을 지냈고, MBC 땡전뉴스를 진행한 이득렬은 사장까지 지냈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03년 발간한 <80년 신군부 부역 언론인들에 대한 방송 모니터 보고서(3차)>에서 "독재에 부역하고 방송계에 왜곡된 조직문화를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진정한 방송 개혁은 요원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