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오스/역사 (문단 편집) == 공산화 이후 ==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고 종전하면서 라오스 국왕이 퇴위하고 지금의 [[라오스|라오 인민민주공화국]]이 수립되어 초대 국가 주석으로 [[쑤파누웡]]이 취임한다. 그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뒤에도 쑤완나 푸마를 숙청하지 않고 살려두어 정부 자문관으로 임명했으나, 나라 안에선 국가통제 중심의 교조공산주의를 강요하여 귀족과 지주, 기업인 등을 반동분자로 찍어 전 재산을 뺏고 재교육장으로 내몰았으며,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 소유로 만들었다. 국민들에겐 공산주의 외의 어떠한 사상도 금지시켰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같은 공산주의였던 북베트남을 지원해왔기 때문에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리고 1980년대 베트남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동맹(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의 일원이 되었다. 다른 한편 공산정부 측은 1978년 농업정책을 협동체제로 전환해 경제공산화를 꾀하려다 경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미 30여년 간의 전쟁으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된 데다 공산화 이전 우방국이던 미국과 태국이 원조 및 경제협력관계를 끊고 중산층 등 라오스 국민 10%가 태국 등지로 망명을 갔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비엔티안을 비롯한 라오스의 상당수 지역이 태국과 강만 건너면 되는데다가 또한 당시의 태국이 매년 7~9%대의 고도 경제성장을 하던 시절인지라 비록 저임금일지라도 일거리는 많았고, 또한 언어적으로도 태국어와 라오어가 사투리 수준으로 가까워서 익히기 쉬워서 문자만 익히면 정착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것도 이를 부채질했다. 1986년 라오스 정부는 경제정책을 수정해 중국이나 베트남과 비슷한 노선을 가고 있으며, 먼저 민간생산을 권장하고 외국자본을 제한적으로 허용했으며, 동년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1989년 동구권 공산정권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로 원조가 끊어져 라오스 정부도 변화의 필요성을 늦게나마 절감했다. 1989년 첫 직선제 총선을 치르고 1991년 헌법을 바꿨고, 같은 시기 경제 자유화 조치를 취했으나 공산당 1당 독재 하에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하는 데 제약이 너무 많이 따랐고, 이에 따라 경제도 바닥을 더욱 뚫었다. 그럼에도 라오스 정부는 1995년 '반혁명활동'[* 경제발전을 위해 공산주의를 부정하거나 저항하는 행동 전반을 말한다.] 단속을 개시하여 국민들의 가난은 안중에 두지 않고 이념 수호에 치중했다. 1997년 ASEAN 가입 후 2000년대 이래 세계 각국의 원조와 협력을 받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현재는 전 주석인 쭘말리 싸이냐쏜이 퇴임함에 따라 [[분냥 보라칫]]이 주석으로 승계 작업을 끝내고 통룬 씨쑬릿을 총리로 임명하여 완전한 권력 이양을 끝맺혀 새로운 [[라오스]]를 표방 하고 있으며, [[라오스]]의 큰 변화가 보일 것이다. 그 예로 현재의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국가 소유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국영기업에 자율권을 부여하여 생산력 향상을 도모하는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베트남과 중국, 태국을 잇는 '교통/물류허브' 정책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이원복 교수의 견해처럼 이미 수명이 다한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이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