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오스/역사 (문단 편집) == 란쌍 왕국 시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of-southeast-asia_1400_CE.png|width=400]] (진녹색이 란쌍) 역사에서의 등장 이래 계속해서 여러 소국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라오스 지역은 파응움(ຝ້າງູ່ມ)의 등장으로 인해 통일된다. 크메르제국 왕가에서 성장한 그는 루앙 프라방에 위치해있던 한 무앙에서 변란을 피해 앙코르로 망명했던 왕자의 아들로, 크메르 왕의 명령을 받들고 현 라오스 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어 그는 루앙프라방에 수도를 정하고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1353년 [[란쌍 왕국]](ລ້ານຊ້າງ)[* 란창(ลานช้าง)이라고도 함.]을 세운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초기 치적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전쟁과 코랏(โคราช)고원 이주 정책과 병적인 탐색(貪色)으로 인해 민심을 잃고 귀족들에게도 미움을 사 끝내 1374년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고, 왕위는 그의 큰아들이 계승하게 된다. 동남아시아사를 다루는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파응움이 귀족세력을 통제하는 데에 서툴렀던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란쌍은 쌈쎈타이(Samsenethai, 1374-1416) 왕 시대에 안정기를 맞는데, 이 왕의 이름의 '30만 명의 따이인'이라는 뜻에서도 보이듯이 이 시기의 란쌍 왕국에서 체계적인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던 듯 하다. 이 인구조사에 따르면, 성인 따이족 성인 남성 인구수는 30만 명이었고 비따이계의 성인 남성 인구는 40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비해 전통시대에 국경이란 개념이 불분명[* 당연히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은 예외다.]했던 동남아시아의 특성상 인구조사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과장이 섞였을 거라 보는 이들도 많다. 쌈쎈타이 왕 사후 라오스는 왕위계승분쟁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쌈쎈타이의 아들 짜까팟팬패오(Chakkaphat Phaen Phaeo 1442 - 1480)가 비엔티안에서 루앙프라방으로 돌아와서 왕위에 올라 란쌍을 부흥시켰으나... 하필 그 시기에 이웃 베트남의 타인 똥(Thánh Tông 1460–1497)이 정복전쟁을 하는 바람에 현 씨앙쿠앙(ຊຽງຂວາງ)지역을 뺏기고 말았다. 씨엥 코앙 분쟁은 베트남과 라오스가 치열한 전쟁[* 단순한 국경분쟁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베트남군이 라오스의 수도 루앙프라방까지 쳐들어갔던 대전쟁이었다. 곧바로 라오스의 반격으로 베트남군이 물러나긴 하지만.]을 벌이고 난 후 라오스에서 베트남의 씨앙쿠앙 영유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일단 일단락되었다. 이후 16세기 들어 [[란쌍 왕국]]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래는 당시 왕들. * 위쑨 왕(Visoun, 1501-1520): 비엔티안에 있던 프라방 불상을 루앙프라방으로 이치시킴, 라오스의 건국신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5793&cid=43004&categoryId=43004&expCategoryId=43004|쿤보롬 신화]] 정리 * 포티싸랏 왕(Phothisarat, 1520-1547): 힌두교 사원·정령신앙 금지(불교 발전을 위한 조치), [[https://en.wikipedia.org/wiki/Wat_Phra_That_Phanom|탓빠놈]](That Phanom) 사원 건설, 비엔티안에 궁전 건설(다음 대에 비엔티안이 라오스의 수도가 되는 기반이 됨) * 쎄타티랏 왕(Sethathirat, 1547-1571): 비엔티안 천도(AD 1563), [[버마]] 침공 격퇴[* 당시 따이계 국가중에서 유일하게 버마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독립을 지키고 있었다.], 치앙마이에 있던 에메랄드 불상[* 현 태국 [[방콕]]의 그 [[https://www.google.co.kr/search?q=%EC%97%90%EB%A9%94%EB%9E%84%EB%93%9C+%EB%B6%88%EC%83%81&tbm=isch&tbo=u&source=univ&sa=X&ved=0ahUKEwi3zZO7hMrOAhXMGJQKHUY2BgEQsAQIHQ&biw=1366&bih=643#imgrc=n6ysmgpe5ofe7M%3A|녹색 옥으로 된 불상]] 맞다.] 비엔티안으로 이치, 루앙 프라방에 [[https://en.wikipedia.org/wiki/Pha_That_Luang|탓루앙]](That Luang) 사원 건설 쎄타티랏 왕 사후 란쌍은 버마의 침공을 받으면서 점령과 독립을 반복하고 왕위계승분쟁에도 시달리다가 쑤린야웡싸(Surinyavongsa, 1637-1694)왕 때 다시 안정기를 맞는다. 이 시기의 비엔티안은 많은 사원이 건설되고 화려한 예술품이 제작되었고, 라오스 문자로 쓰인 문학도 발달하였으며, 서양 국가들과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쑤린야웡사 왕 시기 란쌍 왕국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상인 부이스토프(Gerrit van Wuystoff)가 1641년 비엔티안 외곽의 사원에서 본 왕의 행렬을 쓴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이 당시 란쌍 왕국이 화려하게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 > 흰색 코끼리를 탄 왕이 도심으로부터 와서 우리들 천막 앞으로 지나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듯 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23세 정도 되어 보였다. 약 300명의 군인들이 창과 총으로 무장한 채 그의 앞에서 행진했고, 뒤로는 코끼리를 탄 병사들이 따르고 다시 그 뒤로는 악대들이 지나갔다. 이어서 2000여 명의 군인들이 지나갔고 왕의 다섯 부인을 태운 16마리의 코끼리가 나타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