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랴오닝성 (문단 편집) == 역사 == 랴오닝성은 [[랴오허|요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쪽은 [[요서]], 동쪽은 요동으로 나뉜다. 랴오닝은 [[선사시대]]까지는 [[한민족]]의 중심지였다. [[단군조선]]의 영역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릉하, [[요하]] 유역부터 [[대동강]] 유역까지는 한민족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이 정설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281년쯤에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의 [[진개]]가 단군조선을 [[고조선-연 전쟁|침략]]하여 약 2,000리를 강탈했다고 나오는데[* 2000리는 약 785km다.], 이때에 랴오닝 일대가 한민족의 통치에서 처음 벗어나서 한족의 통치로 들어갔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요하강은 한민족 문명권의 영역과 한족 문명권 영역의 경계선 역할을 했고, 조선과 연나라의 국력이 비등했기 때문에, [[한무제]]가 등장할 때까지, 한민족과 한족의 영역변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정권이 [[단군조선]]에서 [[위만조선]]이 되고 중국이 통일된 뒤에 [[한나라|한(漢)제국]]이 성립되자, 한민족의 국가와 한족의 국가의 국력차이가 극심하게 되었고, 결국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함으로서 랴오닝 일대는 온전하게 한족의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기원전 108년) 하지만 요하강 유역 동쪽에는 아직도 한민족계 인구가 많았다.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한민족계 국가인 고구려(기원전 37년)가 성장하면서 이 인구를 바탕으로 이 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고, 요하강 동쪽은 다시 한민족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요하강 유역을 다시 한나라가 온전하게 지배하게 되는 것은 668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였다. 당나라는 조선 유민들이 고구려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을 기억했고,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을 대규모로 타지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만주전역을 포함해서 요하 동쪽에 한민족계 인구는 매우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과 연합해 한민족계 국가인[[발해]]를 세우고 요동까지 진출한다. 한민족이 점진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민족은 [[거란족]], [[몽골족]]과 [[말갈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이었다. 가장 먼저 차지한 민족은 [[거란족]]이었는데, 거란족계 국가들은 한민족계 인구를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들였다. [[제노사이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발해]]멸망 이후 [[만주]]에서 [[한반도]]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요나라]]를 정복한 이후에는 심양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고려계 인구가 크게 늘었고 요동지역을 통치하는 상징적인 군주로 심양왕을 봉했는데 이러한 사정이 고려되어 고려왕이 겸하거나 고려왕족이 맡았다. 훗날 [[우왕]]시기에 [[요동정벌]]을 계획할 때에도 역사적 연원 뿐만 아니라 실제 요동지역의 주민구성도 정벌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조선 초까지도 이 지역 주민들이 조선인들과 말이 다 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차츰 명나라에 동화되어 가다가 청나라 말기 만주에 대한 봉금정책 해제 후 밀려드는 한족에 뒤섞여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도 실제 고구려 장수왕의 후손을 주장하는 요양 고씨 등 족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미미하지만 존재한다. 이후 거란족 또한 몽골족에 의해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민족은 여진족이었다. 여진족은 점진적으로 서진했는데, 적어도 여말에는 [[아무르강]]지역부터 [[요하]]강 동쪽까지를 차지했다. 물론 몽골제국이 멸망한 이후, 요동지역을 통치하는 나라는 한족의 [[명나라]]였지만 요동지역의 한족인구는 절반을 넘지 못했다. [* 명나라의 수도가 [[베이징]]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족의 영역이 요동까지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여진족이 통일된 이후에 [[만주족]]이 되었고 만주족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온전하게 요하강 유역을 통치했으며,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 [[요동]]지역은 만주족과 한족의 땅이었다. 이 인구비율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였다. 가장 먼저 들어온 민족은 청나라가 대륙을 통일한 시점부터 슬금슬금 만주로 재진출하기 시작한 [[조선인]]이었다. 조선계 인구증가가 지리멸렬한 가운데 만주족을 제치고 이 지역을 석권한 민족은 [[한족]]이었다. 군벌시대로 혼란스러워진 대륙을 피하여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고, 만주 전체에서 꾸준하게 한족인구가 늘어났다. 만주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다시 요동-만주를 반환받을 때쯤엔 이미 한족인구가 대부분이 되었다. 지금도 한족의 인구비율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 지역은 북한과 접경한 지역이며, 한국이나 해외에서 북한선교에 나서는 선교사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편 랴오닝성은 처음부터 랴오닝성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었다. 1644년 청나라는 중원 정복 이후, 중원 지역에 대해서는 '행성제(行省制)'를 적용했지만 만주 지역에 대해서는 장군부(將軍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는 '군부제(軍府制)'를 채택했다. 그리하여 1644년([[순치]] 1)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에 입성한 직후, 순치제는 본래 수도였던 [[선양시|성경]](盛京)을 유도(留都)로 삼은 뒤 내대신(內大臣) 1명을 유수(留守)에 제수하여 유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 유수 벼슬은 1646년(순치 3) '앙방장경(昻邦章京)'으로 개칭된다. 1662년(강희 1) 성경에 있던 주둔지가 [[랴오둥]]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벼슬 이름 또한 '진수요동등처장군(鎭守遼東等處將軍)'으로 개칭되었다. 1665년에는 이름이 다시 '진수봉천등처장군(鎭守奉天等處將軍, 약칭 봉천장군)'으로 개칭되었고, 1747년(건륭 12) 주둔지가 다시 성경으로 옮겨지면서 '진수성경등처장군(鎭守盛京等處將軍, 약칭 성경장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현재의 랴오닝성의 전신이 된다. 그러다가 [[신해혁명]] 발발하기 4년 전인 1907년([[광서]] 33) 관제 개편 시에 성급행정기구로서 봉천행성공서(奉天行省公署)가 설치되어 봉천성이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봉천성이라는 명칭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봉천(奉天)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운명을 이어 받는다'는 뜻의 '봉천승운(奉天承運)[* 명·청 때 황제가 내리는 조서에는 항상 봉천승운(奉天承運)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조서]] 항목 참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1929년 [[동북역치]]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된 뒤 봉천이라는 명칭이 중화민국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의가 있었고 결국 제18차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그해 1월 28일 '''랴오닝성'''으로 개칭되었다. 의미는 '[[랴오허|요수]] 유역이여, 오래도록 평안하라.'는 의미의 요수유역영구안녕(遼水流域永久安寧)이라는 구절에서 '''遼'''와 '''寧'''을 딴 것이다. [[만주사변]] 이후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되자 다시 봉천성으로 개칭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949년에 랴오닝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랴오둥 성, 랴오시 성과 함께 선양, 뤼다, 안산, 푸순, 번스 5개의 직할시가 있었다. 1954년에 이들이 합쳐지면서 랴오닝성을 만들었고 이듬해에 현재 존재하지 않는 러허(중국어 정체자: 熱河) 성이 합쳐지게 된다. 문화대혁명 시기 동안 랴오닝 성은 네이멍구 자치구의 일부를 편입하기도 하였지만 후에 복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