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량스이 (문단 편집) === [[홍헌제제]]에서 [[호법전쟁]]까지 === 하지만 국회 해산 이후 차차 위안스카이의 총애를 잃게 되었는데 1915년 황제병에 걸린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영미의 신뢰를 받고 있고 막대한 재정권을 쥐고 있는 량스이를 이용하기 위해 육군차장 [[쉬수정]], 교통차장 엽공작, 재정차장 장호 등이 철도국에서 횡령을 했다는 혐의를 씌워 탄핵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량스이에게 사건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다고 넌지시 알려주었고 황태자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이 제제를 도울 것을 요구하자 량스이는 교통계 동료들과 상의 후 군주제를 돕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교통계를 표적으로 한 수사는 대거 중단되고 엽공작 등은 관직이 회복되었다. 이후 제제운동을 이를 적극 지원하여 각종 청원회를 조직, 여론을 조작하였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 단행에 이르렀으나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24시간 내로 량스이 등 제제파를 처벌하고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이를 묵살하자 이들은 12월 25일 호국군을 조직하겨 거병했고 이것이 전국적인 [[호국전쟁]]으로 번졌다. 위안스카이는 량스이에게 차이어와 화해를 할 것을 지시하고 [[캉유웨이]] 등 명사들을 포섭하여 [[량치차오]]를 설득하려 했으나 호국군의 입장은 완고했다. 결국 3월 23일에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에 사망하자 남방 군무원의 요구에 따라 제제의 수괴로 지목되어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량스이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이에 량스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량스이의 부재를 틈타 조여림의 신교통계가 성장하여 교통국을 지배하게 된다.]이후 [[량치차오]]의 연구계와 더불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주장했다. 위안스카이 사망 직전에는 [[쉬스창]]의 지시로 청실과 접촉하여 청나라의 복고를 꾀하기도 했으나 청황실에서 멸문지화를 두려워하여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 1917년 [[부원지쟁]] 과정에서 [[돤치루이]]가 면직되자 량스이는 량치차오 등과 함께 돤치루이를 지원하여 [[리위안훙]] 정권을 전복하고 임시 정부와 임시 국회로 대체하려 했다. 그런데 1917년 중재를 이유로 입경한 [[장쉰]]이 난데없이 [[선통제]]를 복위시켜 [[장훈복벽]]을 일으키자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 복직하여 복벽을 토벌했다. 돤치루이는 구국회 복구를 거부하며 새 내각을 조직, 일방적으로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했다. 이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여 호법정부를 수립했고 돤치루이가 토벌령을 내리면서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이 혼란 와중에 량스이는 1918년 2월 사면되었고 6월에 교통은행 이사장, 국내 공채국 총재가 되었다. 1918년 [[펑궈장]] 대총통의 임기가 만료되어가는 와중 8월에 안복국회라 불리는 신국회가 소집되자 9월 22일에 개막된 참의원에서 119표를 얻어 안복국회 참의원 의장[* 부의장은 114표를 얻은 주계검.]으로 추대되었다.[* 량스이와 주계검 모두 곧 사퇴하여 안복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18년 9월 4일 안복국회는 [[쉬스창]]을 새로운 대총통으로 추대했고 10월 10일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톈진에서 평화촉진회를 결성하여 [[호법전쟁]]의 종결을 주장했으나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평을 들었다. 1918년 11월 남북정부가 모두 정전령을 내리면서 호법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량스이는 남방과의 화평을 위해 부총통 자리를 [[천춘쉬안]]이나 [[루룽팅]]같은 남방인사에게 줄 것을 주장했으나 돤치루이가 부총통 자리를 [[차오쿤]]에게 주려고 하면서 끝내 부총통은 정족수 부족으로 선출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