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량치차오 (문단 편집) == 일화 == [[1899년]] [[대한제국]]의 [[독립신문]]에 그의 '애국론'이 실리는 등, 비슷한 시기에 [[독립협회]] 등에 참여했던 조선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박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의 '[[주자(철학자)|주자]]' 수준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이태리]] 건국 삼걸[*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전(意太利建國三傑傳)》, 《[[월남망국사]]》[*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와 나눈 만담을 바탕으로 출판된 책.] 같은 책들은 [[신채호]]가 번역했고, 훗날 일제가 금서 처분했다. 참고로 일제가 태웠다는 20만 권 역사서 떡밥의 금서들에 이 책들이 포함되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약 1300만 자에 달하는데 그중 10% 정도는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들이라고 한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기에 사망 직후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예상대로 량치차오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보신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받아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사관이 강하게 비판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을 가리지 않고 중국의 군주제 혁파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에서이다. 공화파로 대세가 기울자 공화정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긴 했지만 대세에 따르는 것 정도로 보아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