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역사 (문단 편집) == [[몽골-타타르의 멍에]] ==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mongol-attack.jpg]] || [[파일:external/factsanddetails.com/5386c46e29b82.jpg|width=400]] || 사실상 본격적으로 전환기에 들어선 것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서 시작되었다. 키예프 공국이 위치했던 드네프르 강 일대의 평원은 토질이 매우 비옥한 평야 지대여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특성상 제대로 방비하지 못할 경우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다. 한마디로 키예프 공국의 위치는 양날의 검이었던 셈이고 몽골 제국은 키예프 공국이 제대로 방비할 역량이 부족했던 시점에서 침략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예프 공국을 위시한 수많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있어서는 [[불쏘시개]]나 다름없었다. [[사준사구]]라 불리는 8장군의 일원이던 [[제베]]와 [[수부타이]]가 [[칼가강 전투|돌아가던 중에 살짝 툭 치고 간 것만으로도]] 빈사 상태에 빠졌고, 제대로 갈아엎으며 지나가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대부분의 공국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봄이 되자 몽골 기병들이 [[라스푸티차|녹아서 뻘투성이가 된 땅]]에 질려 철수하면서 운 좋게 침략을 면한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외 살아남은 공국들은 키예프처럼 완전한 멸망은 면한 대신 동시대 [[고려]]의 [[원 간섭기]]와 비슷하게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다른 공국들과 달리 몽골의 비위를 잘 맞춰 주며 지냈고, 14세기에 킵차크 칸국의 공주와 정략 결혼하는데 성공하며 이후 러시아 지역의 조세(상납금)를 징수하여 몽골에 바치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당시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이었던 이반 1세는 상납금을 수금받아 그 상납금을 바치면서 간간히 귀한 선물을 준비해 몽골 장군들에게 진상했고 이에 크게 기뻐한 몽골 장군들과 칸들은 이반 1세를 모든 러시아를 지배하는 권한을 주었고 상납금을 받을 권리를 주었다. 이후 이반 1세는 특유의 재산관리와 상납금을 이용해 몽골의 환심을 받았고 이후 돈주머니란 이름의 칼리타란 호칭을 얻었다.] 이후 주변 공국들로부터 상납금을 걷어 몽골에 바치며 주변 공국들에게 [[갑질|갑으로 행세]]하게 되었고, 동시에 모인 돈을 적당히 떼먹으면서 성장했다. 몽골인들은 직접 러시아를 관리하는 것보다 적당히 공물을 징수하다가 트집을 잡고 쳐들어가서 노예를 잡아오는 편을 선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키예프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주교좌를 옮기게 되면서 종교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1480년]] 모스크바 공국군과 킵차크 칸국이 대치하다 그대로 전투없이 철군한 우그라강 전투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가 몽골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본다. [[루테니아]]와 러시아 일대에서 몽골 세력의 위상은 14세기 초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으로 인하여 급속히 추락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1483년 이반 3세는 [[킵차크 칸국]]과 맺은 [[조공]]계약을 불태워 버리면서 전쟁을 걸었고,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이 모스크바를 도우라고 열변을 토하자 거의 모든 공국들이 서방의 십자군 비스무리한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리하여 싸움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면서, (그리고 말 안 듣는 공국들을 때려 잡으면서) 현재의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대공의 경우 [[프랑스]]의 카페 왕조처럼 지속적으로 후계자를 낳으며 계승구도를 확실히 했다. 모스크바 공국 발전 초기에는 대공계승에 적장자라는 계승자가 확실히 있었기에 이전 키예프 러시아처럼 형제상속이 아닌 자연스럽게 장자상속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이러한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계 공국과는 달리 힘을 길러서 킵차크 칸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니꼴라이 V. 랴자노프스키 작, 러시아의 역사 1 '속령 러시아' 부분 참조] 이후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자신을 [[차르]], 곧 황제로 호칭한다. 그의 손자가 유명한 [[이반 뇌제]]이다. 이후 차르의 전제정치는 오랫동안 쭉 이어진다. 물론 [[몽골 제국]]으로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뀌면서 러시아가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말은 몽골 지배의 장점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몽골 제국으로 인해 러시아의 문화는 키예프 시대에 비해 완벽하게 퇴보했다. 러시아가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의 교류가 사실상 차단당한 상태에서 이런 퇴보는 더욱 악화되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문화적 피해를 복구하기까지 러시아는 몇 백 년이 걸렸으며, 러시아 제정 말기까지도 군사적인 면을 제외하고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게 앞서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점은 오직 영토가 커짐을 보고 하는 말이다. 러시아의 동방 개척은 모피 외에는 수출할 게 별로 없었던 그리고 동방 유목민으로부터 적극 영토를 방어해야 했던 러시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수 없는 생존 방식이었다. 속령 러시아 시절 러시아의 국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제국]]을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또한, 러시아의 가장 큰 수출품은 모피였는데, 이 모피를 얻을 수 있는 동물 자원이 계속 고갈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진을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게 이 땅들은 아직은 탐험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지나치게 추운 날씨와 농경의 어려움 때문에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는 경우는 적었다. [[러시아 제국]]이 [[동방]]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로, 그때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는 자국민을 동방으로 [[이민]]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 시절 지도 제작 때부터이다. 러시아가 위상과 군사력으로 대제국이 된 시기는 몽골 제국 덕이 아닌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전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별다른 우위를 보이지 못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키 게시판에서 토론된 바 있으므로, [[https://namu.wiki/thread/AnAutomaticAndTightAccount|이곳]]을 참고할 것.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 등의 문서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