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러일전쟁 (문단 편집) ==== [[인도]]와 [[동남아]] ==== 아시아 국가가 유럽 열강에게 승전을 거뒀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에 따르면 그는 소년시절에 일본의 승전 소식을 듣고 수많은 아시아의 소년소녀와 어른들이 감격했다고 얘기했다. 유럽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놓였던 아시아에서 일본이 유럽 군대를 이겼다는 소식은 그들이 유럽의 지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줘 '아시아인의 아시아' 구호가 퍼지게 된 계기라는 것이다. 인도가 당장 위험에 처한 동아시아의 입장을 고려하기 어려웠듯이, 일본의 침략에 정면으로 노출되고 서양 열강과 대치한 시간이 길지 않은 한국과는 일본을 본 시각이 달랐다. 물론 네루는 같은 저서에서 일본 역시 다른 열강과 다를 바 없으니 주의하라고 했지만, 인도는 [[동남아시아]]와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과의 무력충돌이 없었으며 [[찬드라 보스]]같이 일본과 협력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사람도 등장하는 등 인도와 일본은 전쟁 끝까지 큰 마찰없이 우호적이었다. 결국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아시아주의]]에 경도된 인도 판사[* 인도의 엘리트들은 영국의 식민지 규제 정책 때문인지 영국에서 대부분 이과 계열이 아닌 문과 계열의 [[법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간디, 네루 등 인도의 독립을 이끈 지도자들도 대부분 영국 변호사 출신이다.] [[라다비노드 팔]]에 의해 일본 전범의 양형이 독일에 비해 비교적 낮아지는 계기가 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던 [[베트남]]에서도 일본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아졌다. 일례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축이 된 인물 중 한 명인 판쩌우찐은 러일전쟁을 위해 [[남중국해|베트남 근해]]를 지나가는 발트 함대의 위용을 지켜보았고, 그 발트 함대가 일본군에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베트남 민족 운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는 동유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게이오기주쿠대학|게이오 의숙]]을 본딴 통킹 의숙이 세워지는 등 한동안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이후 태평양 전쟁의 일환으로 일본군이 진주했을 때는 해방군으로써 기쁘게 맞이했다. 이러한 우호적인 시각은 진주한 일본군이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유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