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꽝빈 (문단 편집) == 생애 == 1923년 베트남 남서부 메콩강 삼각주 일대의 롱쑤옌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마을의 농부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그의 양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논밭을 지역 지주에게 강탈당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평생에 걸쳐서 지주층을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주의 아들이 베트남국의 관료이자 베트남 공화국의 초기 주요 정치인 중 하나였던 완옥서(阮玉書)다. 레꽝빈이 반정부 성향을 강하게 보였던 이유가 응오딘지엠이 이런 인물을 기용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젊은 시절에 그는 검지손가락을 스스로 잘라버렸는데,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를 물리치겠다는 맹세로써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이야기는 허구고, 농사일 대신 화호불교 운동에만 시간을 쏟는 그에게 양아버지가 농사 좀 도우라고 잔소리하자 농사일을 안 하고 화호불교에만 투신하겠다는 맹세로 (농삿일에 필수적인) 검지를 잘라버렸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 그가 엄청난 독종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화호불교의 군대에 입대해서 베트민이나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다. 베트민은 한때는 화호불교를 포함한 남베트남의 주요 독립운동 세력, 즉 비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해서 프랑스를 적대하였으나, 1947년부터는 본색을 드러내서 동맹을 배신하고 다른 세력들의 수장들을 납치,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호아하오교의 지도자였던 후인푸소([ruby(黃富楚,ruby=황부초)], Huỳnh Phú Sổ) 역시 베트민에게 납치당해 곧 옥사하게 되고, 호아하오교는 당연히 교주의 복수를 다짐하며 베트민을 적대하게 된다. 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죽자, 강화된 반공성향과는 별개로 화호불교의 군대는 4개의 분파로 분열되었고, 레꽝빈은 그 중 하나의 지도자가 되었다. 비록 규모가 상당히 작은 1000명 정도에 불과했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후인푸소가 죽은 47년에 그의 나이는 고작 고작 만 24세에 불과했다. 소대장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대대장이 된 셈이니. 그의 분파는 다른 화호불교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베트민에 대한 적대감으로 프랑스군과 협력관계를 맺긴 했지만, 유난히 프랑스군과도 치고받기를 반복했으며, 베트민 뿐 아니라 다른 호아하오교 분파랑 까오다이교와도 종종 교전할 정도로 반골 기질이 강했다. 응오딘지엠이 베트남국의 수상으로 집권하자 종교파들은 응오딘지엠의 친지 위주 내각을 비판하고 그와 협력하길 거부한 연합전선, 그리고 응오딘지엠과 협조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도 관철시키기를 추구했던 혁명위원회로 갈라졌다. 레꽝빈은 반골 기질답게 당연히 연합전선 쪽으로 갔고, 곧 응오딘지엠과 혁명위의 토벌 대상이 된다. 55년 초, 레꽝빈의 군대는 [[찐민테]]의 부대와 교전하였으나, 패배하고 레꽝빈 스스로도 가슴에 총을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그를 구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공군의 헬기였다.''' 그는 프랑스인들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했으나, 남베트남 정부와의 갈등관계가 해소되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