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벤스라움 (문단 편집) == 평가 == 나치는 소위 아리아인이 살 땅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을 다 꿀꺽해 그 땅에 살던 타 민족을 복종이 아닌 절멸시키려고 했지만 사실은 그 광대한 땅을 이용하기 위한 인력은 독일 국민 전부를 동원해도 턱없이 모자라다는 [[자가당착]]에 직면하였고[* 당시 독일 인구가 100이라면 소련 인구는 200이었고 소련의 우랄 산맥 서쪽 땅만 해도 독일보다 훨씬 컸다. 2배, 3배 그 이상이었으니 전국민을 동원한들 될 리가 없다. 하다못해 여기가 살기 좋은 땅이라면 모를까 소련의 겨울 추위는 겁나게 무서운 수준이었다. 개발을 시도해도 될 턱이 없다.][* 레벤스라움이 실현되었다면 인구밀도가 26(명/km²) 정도가 되는데, 이는 브라질(...)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세계 평균 인구밀도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보면...~~] 결국 아리아인만을 빠르게 늘려 퍼트린다는 망상에 빠지면서 아리아인만을 생산하는 기관인 [[레벤스보른]]을 만들어 아리아인이란 개념에 맞는 친위대원과 미혼의 여자들을 교배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출산율을 회복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을 써서 출산율을 1933년 1.67명에서 1939년에 2.59명으로 올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합계출산율이 3~5명대였던 독일제국 시절에 비해 출산율이 현저히 낮았고 실상 인구증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대륙과 구소련권의 독일인들까지 끌어모아야 겨우 될 판이었다. 레벤스라움을 주창한 하우스호퍼는 훗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히틀러와 사이가 멀어졌고[* 하우스호퍼는 독일이 대륙세력으로서 영국, 미국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위해서는 역시 대륙세력인 소련과의 제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는 독소 불가침조약과 이후 2년 동안 계속된 독일의 유럽 지배가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후에 일련의 사건들[* 하우스호퍼의 제자인 [[루돌프 헤스]]가 영국 관계자들과 접촉하는가 하면 그의 아들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을 이유로 히틀러로부터 버려졌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나치의 만행 여부를 떠나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히틀러가 하우스호퍼의 의견을 받아들여 독소전쟁을 안 했다면 유럽 대륙은 크게 나치 독일과 소련이 양분하는 상태로 장기화되었을지 모른다. [[독소전쟁]]에만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를 소모해야 했기 때문에 만약 독소전쟁을 안 했다면 그 인력과 물자를 기존 점령지 탄압 및 방어시설, 주둔병력 증대에 충분히 투입, 즉 '굳히기'에 들어갔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여파로 중화기는 거의 다 놔두고 몸만 딸랑 자유 프랑스군 등과 함께 영국으로 도망친 건지라, 장비도 겨우겨우 미국이 랜드리스를 해줬을 뿐 그 자체로 상륙 작전 및 탈환을 할 상황이 도저히 못 되었다. 미국도 독일과 소련을 한꺼번에 상대할 마음은 나지 않았을 게 뻔하고, 스페인이나 스웨덴은 친독중립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데다 헝가리, 루마니아 등 나머지 국가들은 말이 독립국이지 나치 독일의 괴뢰국 혹은 꼭두각시 수준인지라 미국과 영국에 대한 협조도 기대할 수 없었을 테니... [[경제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레벤스라움은 헛소리에 가깝다. 산업사회에서 국가의 경제적 힘은 잘 교육받은 많은 인구와 고도의 인프라가 갖추어진 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광대한 동유럽 전체를 독일 수준으로 산업화시키는 것은 자원 및 자본의 한계로 불가능에 가까운 반면에, 이 당시 나치독일은 활발한 인구증가세를 기록하던 독일 제국 시절에 비해 출산율이 현저히 감소했던 상태로, 출산율을 높였다고는 해도 1930년대 말의 시점에서 본다면 출산율이 2명대 중반 수준으로 당대 기준으로 3~4명대의 출산율을 기록하던 소련 및 폴란드에 비해 현저히 낮았고 이 때문에 독일인 인구만으로 레벤스라움을 유지하려다가 오히려 인구의 대규모 유출로 독일 본토의 쇠락을 가져올 위험이 높았던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동유럽]]이 이런 꼴이 되었다. 동유럽의 출산율이 1990년대에 급감했는데 그나마 있는 인구가 서유럽으로 유출되면서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는 것이다. ] 이와 비슷한 예시가 [[헬레니즘 제국]] 시절의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인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 그리스 사람들이 죄다 동방으로 떠나 버리는 바람에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 본토는 인구 부족으로 쇠퇴해 버렸고 결국 빈껍데기만 남아 [[로마 제국]]이 낼름했다. 그리고 레벤스라움의 모티브가 된 동방식민운동의 중지도 [[30년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건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전처럼 경제적 목적으로 거점으로 조금씩 [[식민지]] 만들던 것에서 정치적/외교적 목적으로 드넓은 식민지를 만들다 보니 유지비용이 감당이 안 된 것. 거기에 착취가 목적이다 보니 식민지인들의 반발은 당연했으며 그걸 진압하느라 비용이나 인력을 식민지에 너무 많이 써야 해서, 1차 대전 전의 영국과 프랑스는 실제 국력이 독일보다 뒤처졌다. 독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 재상부터가 식민지 너무 넓히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그냥 거점별로 상징적인 수준에서 조금씩 만들고 그만두었다. 사실 빌헬름 2세가 트롤링 안하고 비스마르크의 구도대로 계속 갔으면, 지금쯤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레벤스라움은 커녕 옛 [[독일 제국]] 영토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서독]]이 인구 부족 문제로 인해 수백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게 부족한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다만 이는 2차대전 직후 성인 남성이 부족해진 것과 동서로 쪼개진 것에 기인한 바가 크다. 물론 인구가 더 많이 늘어난 현대의 독일도 땅이 부족해서 곤란함을 겪고 있지는 않다. [[국가별 인구 밀도 순위]] 참조.] 물론 그렇다고는 쳐도 이 인구로는 레벤스라움 달성은 턱도 없다. 당연하겠지만 2차대전 이전의 독일 인구는 2차대전 이후보다 많기는 했지만 땅 역시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안슐루스]], [[뮌헨 협정]]으로 인해 1939년 당시만 해도 독일은 현 독일+폴란드 일부+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였다. 물론 그 인구들은 뭐냐고 하겠지만 이 인구를 다 합쳐도 소련 땅은 그래도 그들이 감당하기엔 광활하다. 현 러시아의 우랄 산맥 서쪽 영토는 오히려 구 소련 시절보다 축소되었지만 그 넓이는 나머지 유럽 대륙 국가들을 다 합쳐놓은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레벤스라움을 전부 경영할 만한 [[독일인]]의 인구라고 하면 독일의 출산율이 독일 제국 시절처럼 꾸준히 3명대 이상을 유지했으면 나라 안에서 [[인구밀도]] 때문에 경제적 타당성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예술]]적, [[철학]]적으로 유명한 [[고흐]]의 낡은 구두 논쟁은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 그림에 늙은 아낙네를 상정함으로써 땅과 삶터, 근간에 대한 이 사상을 담았다고 해석된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나치]]에 열렬히 협력했으며 그 덕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총장에 임명되었고 나치당에서 고위간부가 되기도 했다. 그는 대학 총장 당시에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나가 살인을 하라고 권장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구두 그림 해석은 유대계에서 민감한 주제였으며, 유대인 은사의 영향을 받았던 마이로 샤피로가 은사의 유고 논집에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반박한 토대가 되기도 했다. 레벤스라움은 나치 침략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철저히 비판을 받았고 [[지리학]]계에서도 [[흑역사]]로 취급되었다. 나아가 [[지정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침략자]]들의 [[사이비]] 이론'으로 매도되어 없어질 위기에까지 놓였다. 하지만 얼마 안되어 [[냉전]] 시대, 즉 [[소련|대륙]] [[중국|세력]]과 [[미국|해양 세력]]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대립한 시대로 진입하면서 다시금 하우스호퍼의 이론은 중요한 자리에 올랐고 지정학은 국제정치의 중요한 이슈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