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클리스 (문단 편집) === 전쟁의 포화 속에서[* Geer 1955, Part 2, p.90-151]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30717160023.jpg|width=100%]]}}}|| 해병대에 입대한 아침해는 [[M20 무반동포]]의 별명인 Reckless Gun에서 따온 레클리스(Reckless)[* "위험천만한, 무모한" 이라는 형용사로, 무반동총(recoilless gun)과 발음이 유사한 데서 나온 언어유희. 실제로 무반동총은 무겁고 관통력이 약한데 반해 후폭풍 반경은 커서 위치가 노출되기 쉬운 상당히 위험한 무기였다.]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침해는 전투중 [[탄약]]을 운반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인 탄약수송병을 맡게 되는데, 400kg의 이 작은 암말[* 일반인에게 익숙한 [[서러브레드]]의 평균 체중은 약 450kg이며 440kg 이하일 경우 작다고 인식된다.]은 총알과 [[포탄]]이 날아오는 전장에서 무거운 탄약더미를 부지런히 나르며 임무를 수행했다. 무반동포 소대가 사용하던 [[M20 무반동포]]의 탄약 중량은 발당 9kg 가량이었는데, 레클리스는 이를 한 번에 최대 12발까지 실어나를 수 있었다. 차량이 달릴 수 없는 [[한반도]] 전방의 험준한 산지에 적이 접근하기 힘들도록 만든 진지 주변의 거친 지형과 진창같은 논밭을 문제없이 달리며 포탄을 옮길 수 있었고, 다른 [[말(동물)|말]]과는 달리 무척 영리해서 1~2번 같이 동행하면 그 뒤에는 혼자 보내도 알아서 길을 찾아갔다.[* 레클리스는 아직 아침해였던 시절, 서울에서 피난을 갈 때 한강을 혼자 헤엄쳐 수차례 건너면서 김혁문 일가를 한명씩 태워다 준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적의 사격이 시작되면 엎드려서 사격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았고, 참호에 피신하는 훈련을 받은 뒤로 포격이 시작되거나 "[[incoming#s-2|포격이다! (Incoming!)]]"라고 동료가 외치면 알아서 참호에 들어가 엎드려 피했다. 무반동포의 발사를 처음 목격했을 때는 후폭풍과 발사음에 깜짝 놀라서 두 발로 설 정도로 뛰어올랐으나, 두 번째 발사 이후부터는 진정하였고, 그 뒤로는 주변에서 발사되더라도 놀라지 않아서 이름값을 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Geer 1955, p.104-109]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30717160040.jpg|width=50%]][[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30717160031.jpg|width=50%]]}}}|| 특히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 한국전사 중 가장 치열하기로 손꼽힌다는 네바다 전초 전투에 참가해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다. * 네바다 전초 전투는 1953년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공동경비구역|판문점]] 동북방 16km 지점인 현(現) [[연천군]] [[백학면]] 매현리 지역인 네바다 전초[* [[라스 베가스|베가스]] 전초, [[리노(도시)|리노]] 전초, [[카슨 시티|카슨]] 전초. 이 지점을 성공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도박이라는 현지 지휘관의 심정에 따라 도박과 관련된 지명 이름이 붙었다.]를 방어 중이던 美 해병 제1사단 제5해병연대가 전초진지로 침공한 중공군 제120사단을 격퇴하기 위하여 전개한 방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미 제5해병연대는 3월 26일 밤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베가스 전초와 레노 전초를 상실한 후, 제7해병연대 1개 대대와 [[포병]] 및 [[공군]]의 지원하에 역습을 감행하였으나 되찾지 못했다. 이에 미군은 레노 전초 탈환을 일단 보류하고 베가스 전초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목표를 탈취하였으며, 그 후 중공군이 3일 동안에 걸친 재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미해병대는 끝까지 베가스 전초를 확보하고 중공군 제 120사단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사상자 수는 1,3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美 해병 부대도 118명이 전사하고 801명 부상에 실종 98명의 손실을 입었다. 베가스 전초는 가히 피로 지킨 고지였다. 레클리스가 탄약을 날라야 했던 무반동총 소대들은 베가스 전초에 최대한 빠르게 포탄을 퍼부어야 하는 작전 특성상 진지 전환을 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사격을 계속해야 했다. 당연히 진지 주변에는 무반동총을 무력화시키려는 총격과 포격이 비처럼 쏟아졌고, 이들에게 포탄을 날라다주는 레클리스 역시 최중요 목표였기에 중공군의 조준사격을 당했다. 레클리스의 등에 포탄을 실어주는 [[ASP#s-2|탄약보급소]] 장병들은 이번이 레클리스의 마지막 임무이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느끼며 숙연해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클리스는 기적처럼 생환하였다. 5일간 전투중 무반동총 사격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1953년 3월 27일에 레클리스는 총 51회, 거리로는 56km를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 날 사용한 무반동총 포탄의 95%인 386발, 9천파운드(약 4000kg, 4톤) 달하는 탄약을 혼자서 운반하였다. 덕분에 장병들은 무반동총 중 하나의 포신이 과열로 녹아내릴 정도로 [[제임스 밴 플리트#s-2.3|충분한 양의 포탄을 받아]] 끊임없이 사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Geer 1955, p.133-139] 당시 미 해병대 Babbit 상사는 "암갈색 몸매에 하얀 얼굴을 한 레클리스가 말 없이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포탄을 날라주는 모습을 보고 모두 감동해서 사기가 진작되어 적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전한다. 작전 도중 레클리스는 2군데(왼쪽 눈 위, 왼쪽 둔부)에 파편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된 적이 있다. 일반적인 말이었으면 임무 재개가 불가능했을만한 부상이었지만[* 말은 고통에 대단히 민감한 동물이고, 기억력이 좋아서 [[PTSD]]도 심하게 겪기 때문에, 특정 지점에서 큰 고통을 받으면 해당 지점을 기억하고 되도록 다시 가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말을 훈련시킬 때는 최대한 고통을 주는 일이 없도록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실제로도 '''기적의 명마'''라는 이명까지 얻은 [[토카이 테이오]]는 잦은 골절로 고생을 했고 그때문인지 의사를 무척 싫어했으며 하얀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의사로 오인해 난동을 부린적이 있다.], 레클리스는 치료와 약간의 휴식만을 받은 뒤 끝까지 임무를 완수했다.[* Geer 1955, p.137] 이 일로 [[퍼플 하트]]를 2회 수여받았다. 또한 중공군의 백린섬광탄이 지근거리에 터졌을 때도 페더슨 중위가 자신의 방탄조끼로 눈을 가려주자 침착하게 기다린 뒤 임무를 속개했고, 수송 작전 하루 후인 3월 28일에는 30미터 거리에 또다시 백린 연막탄이 떨어졌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동료 해병의 인솔하에 안전하게 위험 지역을 떠났다.[* Geer 1955, p.136, 139] 사람도 [[트라우마]]를 겪을 만한 눈 주위 부상이나 백린탄 공격 등을 당한 뒤에 전선으로 복귀한 것은 일반적인 말의 범주를 넘어서는 정말 대범한 일이다. 터프함과 전우애를 미덕으로 여기는 해병대는 이런 레클리스의 침착함과 인내심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30717160048.jpg|width=100%]]}}}|| || [[미합중국 해군|해군]] [[의무병|의무부사관]]의 보살핌을 받는 중.[* 귀가 들어갈 구멍을 뚫은 군모를 종종 선물받았는데, 사진에서 쓰고 있는 호주군의 챙이 넓은 군모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진 촬영이 끝난 후 뜯어먹었다고 한다.] || 자동차를 쓸 수 없는 지형에서 레클리스는 장정 여러 명의 일을 맡을 수 있고 책임감도 강한 훌륭한 전우였다. 레클리스는 장정 12명이 짊어질만한 통신선을 메고 통신선 구축을 도왔고, 포탄을 나른 뒤 돌아올 때는 부상병을 등에 업고 수송하기도 했다. 상술할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의 일화로, 레클리스는 포탄을 나르러 가는 길에 진지로 향하는 동료 해병 4명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고, 동료들은 이러한 레클리스가 다칠 것을 우려해서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방탄복|방탄조끼]]를 벗어서 입혀주기까지 했다. 자유시간에는 [[보이텍|주둔지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동료 해병들과 놀거나 텐트에 들어가 함께 자기도 했다. 겨울에 추울 때는 사육사인 레이텀 중사의 텐트에 들어가 난로를 쬐며 쉬었다. 네발 달린 전우를 배려하는 뜻에서 레클리스의 등에 타지 못하도록 연대 차원에서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루이스 풀러]] 준장에게만은 허용되었다.)[* 태백 근처에서 모처럼 방목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한 병사가 명령을 무시하고 등에 탄 적이 있는데, 2년여만에 사람을 태우자 예전에 경주마로서 훈련받을 적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갑자기 전력질주를 한동안 하다가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umamusme&no=1791143|#]] --레 클리스 하사님의 지뢰밭 더비--] 어느날 밤에는 방목지를 혼자 빠져나와 최전선에 있는 다른 소대의 참호까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무반동포 소대는 이미 자신의 존재에 너무 익숙해져서 무덤덤했기에 다른 소대로 가서 관심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여기서 레클리스는 장병들이 꿍쳐둔 C-레이션 간식을 같이 먹으며 장병들에게 심신의 안정을 주는 마스코트 역할을 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30717160058.jpg|width=100%]]}}}|| 몇몇 병사들은 당시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경주마였던 [[네이티브 댄서]][* 전 세계 경주마계에서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혈통의 시조로 [[미스터 프로스펙터]]의 친조부이자 [[노던 댄서]]의 외조부이자 일본 2대 아이돌호스인 [[오구리 캡]]의 친조부이다. 22전 21승에 2착 1회로 11연승, 10연승과 연대율 100%를 자랑한 명마중의 명마이자, 흑백 텔레비전 시대에 회색마인 덕분에 일반인에게도 눈에 잘 띄어서 더 큰 인기를 얻은 최초의 슈퍼스타 경주마였다. 21세기 현재 대다수 미국산 서러브레드에는 네이티브 댄서의 피가 흐르고 있다.]에게 레클리스와 경주하자고 도전장을 보냈는데, 포탄 90kg을 지고 기수 없이 논과 언덕을 뚫고 1.5마일을 주파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서러브레드는 속도를 위해 내구성을 희생한 품종이므로, 부담 중량이 65kg을 초과한 상태로 전속력으로 달리면 [[텐 포인트|다리가 부러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말도 안 되는 경기 조건은 귀하게 자란 서러브레드 왕자님은 못하지만, 자신들처럼 전장에서 구른 레클리스는 여태껏 그렇게 해왔다는 자부심을 해병대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레클리스를 자신들과 같은 해병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경주에는 논밭 더비(Paddy Derby), 경기장에는 굴곡 경기장(Upsan Downs)[* 부산의 스펠링을 비틀어 업산(Upsan)으로 적고, 인생사의 굴곡을 나타내는 Ups and Downs에서 따온 말장난.]이란 이름까지 붙여 사진을 찍어 보냈다. 물론 네이티브 댄서 측에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미 해병대 측에서 도전장을 보낸 후 며칠 뒤, 네이티브 댄서는 켄터키 더비에서 생애 유일한 패배를 겪었다. (Geer 1955, p.144-145)]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30717160106.jpg|width=100%]]}}}|| || 휴식 중 [[초콜릿]]과 [[맥주]]를 즐기는 레클리스 || 비전투 상황에서 레클리스는 상당한 [[먹보]]였다고 전해진다. 건초 외에도 감자, 땅콩버터 샌드위치, 사탕 같은 평범한 음식부터 스크램블드 에그, 베이컨과 같은 동물성 음식도 가리지 않고 먹었으며,[* 사실 우리가 초식이라 알고 있는 말과 소를 비롯한 거의 모든 초식동물들은 기회만 된다면 육식도 한다. 야생의 풀을 뜯다 보면 수많은 곤충도 자연히 같이 섭취하며, 생쥐 등 작은 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 다만 이들의 주식이 식물이며 중, 인간 같은 대형 동물을 사냥감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잡아먹지 않을 뿐이다. 무엇보다 내장기관 특성상 대량의 육식은 적합하지 않다. 그래도 소량이라면 가능하다는 뜻. 현존하는 동물 중 진짜 풀만 먹고 사는 순수 초식동물들은 [[코알라]]와 [[이구아나]]뿐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상당한 열량과 단백질을 소모했을 레클리스에겐 건초보단 군인들이 먹을 고단백 고열량 식단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코카콜라[* 고열량 간식이어서 비만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 2병으로 제한해야 했다고 한다.]와 맥주도 즐겨 마셨다.[* 몇몇 말들은 주인이 주는 맥주에 맛들려서 즐겨 마시기도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기네스]] 흑맥주를 주식처럼 마시고 광고 모델까지 했던 미국의 경주마 [[젠야타(말)|젠야타]].] C-레이션을 비롯해서 자신들이 먹는 음식을 그대로 받아먹는 모습에 해병들은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사과를 특히 좋아하여 아침이 되면 사육사가 자신에게 사과를 줄 때까지 얼굴을 핥았다고 한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는 맥주를 포함하여 사람이 먹는 군것질거리가 잔뜩 있는 호화로운 만찬에 익숙해져서 크리스마스 이후 며칠간은 건초를 먹을 것이 아닌 깔고 잘 침구로만 여겼다고 한다. 먹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뭐든 입에 넣어보는 습관이 있어서 레클리스의 주변에는 음식물을 두고갈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 도착한 날에는 기념식에서 꽃 장식과 케이크도 먹었다. 심지어 초콜릿[* 원래 초콜릿은 [[마약|강력한 흥분제]]로 말에게 독성 물질로 작용하는 [[테오브로민]]이 포함되어있어서 소량만 먹어도 심혈관계 이상을 유발할 수 있는데, 레클리스는 신기하게도 포탄을 나른 후 쉬는 시간에 초콜릿을 먹으면서 원기를 찾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격렬한 전장을 오가면서 다져진 건강과 스트레스를 초콜릿으로 중화했던 모양. 다만 병영식 메뉴인 초콜릿 푸딩만큼은 몸에 안 맞아서 먹은 후 설사를 했다고 한다. 다른 해병들도 [[짬처리|자신들도 맛없어서 못 먹는 푸딩]]을 호기심 때문에 먹게 한 것에 미안해 했다고.], 철모의 내피, 호주군 군모, 자신이 입을 말 담요와 조련사의 포커 칩도 먹은 일이 있었다. 포커 칩을 먹기 직전에는 조련사가 겨드랑이에 끼운 담배갑을 먹으려고 물어서 조련사가 식겁하며 말렸다고 한다.[* Geer 1955, p.119-1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