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군 (문단 편집) === 로마군의 봉급과 소비 === 제정 시기 로마군은 1년에 3회 봉급을 받았으며, 이 돈으로 무기와 장비를 장만하고 의식주와 취미생활을 했다. 병사의 봉급은 임금 노동자보다 조금 많은 정도였다. 초기 지급되는 갑옷이나 칼 등은 국가가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후 소모되는 장비는 개인 돈으로 해결해야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티베리우스 황제 즉위 판노니아의 도나우 군단 반란을 주도한 페르켄니우스의 '군복과 장비를 우리 봉급으로 사야한다!'라는 말에 대해 국가에서 공급해주었으니 엉터리 선동이라고 평했지만 오히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 정부가 군단병들에게 장비를 지급해주었다는 '''근거없는 거짓말'''로 로마군을 미화한 것이다. ] 보통 70%를 식비와 의복비 등의 생활비로 소모했으며, 특히 갑주랑 무기 유지비가 가장 많이 들었다. 따라서 실제로 가용한 자금이 크게 부족했으므로 성실한 병사는 이 돈을 낭비하지 않고 저축할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돈이 모자라는 병사가 많았다. 또한 경제가 잘 돌아가던 제정 중기와 오현제 시기에는 그래도 나았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는 봉급 체불이 꽤 자주 있었다.[*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이미 사용 기한이 지난 무기를 병사들이 사용하는 형편이라고 원로원에 서한을 보낸 바 있었는데, 병사의 봉급으로 무기를 교체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3세기 중엽부터 봉급 체불이 자주 이루어져 무기 교체도 어려워지는 형편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심지어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 라인강과 판노니아 군단의 파업 요구 사항 중 전역 기간을 지난 병사들에 대한 즉각적인 퇴직금 및 전역 조치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손질받은 초기 로마군단의 운영 실체가 시오노 나나미의 상상처럼 이상적이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화정 말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명목상 무기, 장비, 의복 등은 지급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나마 징병제 말기에는 워낙 사람이 부족해서 재산이 거의 없는 병사도 전쟁터에 보내야 했으니까 국가가 지급하기도 했지만 모병제 이후에는 병사들이 자기 장비값을 내는 '''[[공동구매]]'''가 정착되었다. 또 이 병사들이 구매해야 하는 '장비'에는 무기와 갑옷뿐만 아니라 의복, 신발, 텐트, 이불, 식기, 건초 같은 군생활에 필요한 것들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봉급 부족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의 병사 반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고, 군 당국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처우 개선 요구로 인한 평시 집단 행동에 대해서는 의외로 처벌이 가벼운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전장에서의 명령 불복종은 사형 내지는 그에 상응하는 최고 수위 처벌이었다.] 로마가 안정기에 접어든 후에도 박봉 문제는 심각했는데, 1세기 제 1차 유대 전쟁 당시 [[마사다 요새]] 공략전에 참전했던 한 로마 기병의 급료 명세서를 보면 급료 50데나리우스로 식비, 의복비, 군장 구입비, 말 사료비 등을 지출하고 나자 '''한 푼도 남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병사가 무기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를 일으켰다. 로마군이 사용한 투창인 [[필룸]]은 적의 기병이나 전차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방진을 짜고 기병대를 견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무기였다. 그러나 필룸은 상당히 비싼 데다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로마 후기에는 결국 다트형 투척 무기 플룸바타 혹은 베르툼[* 단 이런 세부명칭에 당대인들은 그다지 집착하지 않고 그저 필룸으로 흔히 불렀다.]으로 교체되었고, 궁수와 기병대로 방진을 지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로마군도 이게 문제라는 인식이 있어서 일부 금액을 따로 떼어 저축하게 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도미티아누스는 군단병 급여를 2배 인상해줬는데, 이 인상분의 상당수는 의무적으로 저축한 뒤 퇴직금과 함께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상해줬다. 의외로 군단병들에게도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게, 현대에도 씀씀이가 헤퍼서 저축을 잘 못하고 허송하는 타입이 꽤나 많은것을 고려해보면 국가가 반강제로라도 씀씀이를 제한해 노후 자금을 준비하게끔 해주는 체제 자체는 전혀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중도 전역하는 병사들이라도 중대한 군율 위반으로 추방되는 등의 사유가 아니라면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또한 봉급만으로 보면 무척 낮아보이지만, 언급되었다시피 '''로마군에게는 퇴직금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대]]에 퇴직금 주는 직장은 많지 않았다. 물론 놀고 먹을 비용이라기보다는 재사회화 과정에서의 정착 비용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로마군은 17세부터 입대할 수 있었고 만기 20년을 채운다 해도 37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고대라고 해도 군단에 입대할 정도로 건강했다면[* 당시 로마 인구의 90% 정도가 문맹이었으므로 로마군은 교육 수준은 크게 문제삼지 않았지만(다만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고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요구하였다), 체력 테스트는 철저했다. 체력이 모자라면 전투 중에 쉽게 지쳤다가 적군의 공격에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입대 이후에도 수시로 체크를 했다. 모자라면 그냥 [[복무 부적격자|조기 퇴출]]. ] 적어도 15~20년은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기 전역할 정도면 대개 자녀도 여럿 두었기에 재사회화는 불가피했다. 과거 공화정 시기에는 해산된 군단의 병사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지만, 제정 시기가 되면서 만기 전역하는 병사들에게는 퇴직금이 주어졌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까지는 은퇴하고 땅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오르고 나서 입안한 법안 중 폼페이우스가 제출한 동방 속주 재편안과 폼페이우스 퇴직병들을 위한 토지 분배안이 있었다.] 제정 시대인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는 돈으로 받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사실 이쯤부터는 로마가 팽창정책에서 수비 정책으로 바뀌면서 퇴직금으로 나누어줄 토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군단병으로 20년을 복무하고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3000 [[데나리우스]]를 받았는데 이는 무려 13년치 연봉이었다. 또 [[카라칼라]]는 월급만 올려준게 아니라 퇴직금도 5000 데나리우스로 올렸다. 퇴직금을 돈으로 받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때로는 퇴직금에 해당하는 땅을 받고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로마 후기에 땅을 받은 병사들은 은퇴한 뒤에 리미타네이가 되어서 파트타임 농부-파트타임 병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69년 4황제 혼란 당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존의 동방 군단에 퇴직 병사들을 재모집하여 로마로 진군한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제정 시기와 비교하면 과도기였던 내전기는 병사들이 금전적으로 풍족한 시기였다. 특히 상여금이 많았는데,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더 많은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부하 장교들에게 돈을 꾸어 상여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빚을 하도 많이 져서 채권자들이 쩔쩔매며 더 많은 돈을 빌려줬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시오노 나나미]] 때문에 퍼져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빚쟁이들이 멀쩡히 돈을 떼이고 가만히 있는 족속은 아니며,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기 바로 전에, 카이사르가 원정에서 빚을 갚지 않고 죽을까 걱정한 빚쟁이들에게 붙들려 맞아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이기도 했던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빚 전체를 보증함으로서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부임할 수 있었다.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빚에 대해 한 보증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였고, 카이사르는 그 값을 충분히 했다. 봉급으로 소금과 향신료를 주기도 했다. 봉급을 뜻하는 영단어 'Salary'가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sal, salis'(명사 제3변화)에서 나왔을 정도다. 내전기에는 장군들이 병사의 지지를 얻으려고 상여금을 마구 뿌려댔지만, 제정 시대에는 이런 관행이 없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군들이 [[군벌]]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장군들은 상여금을 마구 뿌려 병사들의 지지를 얻은 다음 그들을 자신의 사병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우구스투스는 봉급 수준을 모병제 도입 초기에 비해 3배 가까운 225데나리우스까지 올렸지만 그리 큰 돈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차피 제대하고 나서 일거리를 찾기 어려운 마당인지라 복무하면서 알고 지낸 소속 부대 장군의 사병으로 활동하는 게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로마가 확장을 거듭할 때는 적의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 한 번 크게 저지르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지만 역시 제정 시대에는 확장이 멈추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드물어졌다. 그나마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관행적으로 소정의 상여금을 하사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게다가 상여금의 부여 횟수나 금액도 내전기보다 줄어들었는데, 사실 국토가 넓어지자 지켜야 할 국경이 길어지다보니 영토 관리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고 로마의 적들도 갈수록 강력해져 확장 정책이 갈수록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로마 정부는 군인들의 처우를 적당히 개선하여 봉급을 저축할 여유를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위에 언급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봉급 인상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병사가 진짜 돈을 아낀다면 30% 정도 저축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근위병은 도시 근처에 주둔하긴 했으나 평소에도 외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혹독한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군단병은 분위기는 좀 더 자유로웠으나 기지가 대부분 도시와 떨어진 전방에 있었다.] 여가 시간에 농사를 짓거나, 닭을 기르거나, 그 밖의 잡일로 [[부업]]하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서로 돈을 꿔주고 '''갚으라고 독촉하는''' 편지도 남아 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이 필요해서 부쳐달라는 편지도 발견되었다.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탈도 때때로 허용되었다. 게르만족 등 가난한 야만족과 싸우는 경우에는 전리품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게르만족이 로마를 약탈하는 중요한 원인이 로마인들이 자기들보다 잘 살기 때문이었던 이상, 자기들도 잘 못사는 땅에서 더 잘사는 나라 군대가 [[약탈]]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나마 포로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펼친 다키아 원정처럼 풍요로운 지역[* 다키아는 풍성한 금광과 은광을 자랑했다.]으로 출동하는 경우에는 풍성한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나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는 부유하지만 막강한 적이다 보니 약탈하거나 전리품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국력도 막강하고[* 그러나 로마에 비하면 인구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기에 로마와 맞먹는 수준은 아니었다.] 기병 전력이 로마보다 압도적이다보니[*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가 기병 전력에서 밀린 것은 절대 아니다. 로마의 기병부대도 막강한 데다 로마군도 대기병 전술을 개발하여 맞섰기에 파르티아와 페르시아도 기병전으로 나가다가 참패한 적이 많았다.] 당연히 상대하는 게 힘들어 약탈이 쉬울 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로마군은 약탈보다는 상여금에 관심이 많아져 후기에 가면 상여금을 올려달라는 병사들의 요구가 빗발친다. 하지만 이게 부작용을 가져왔는데, 왜냐면 황제랑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화폐를 마구 찍어내서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전기같은 경우에는 화폐의 귀금속 함유량이 높아서 실제 가치와 명목 가치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가 추락하는 [[3세기의 위기]]부터는 사실상 은화가 은도금한 동전으로 바뀌는 등 악화가 주조되는 바람에 심각한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그래서 상여금이 많이 지급되어봤자 물가 상승으로 인해 병사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진 게 별로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