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군 (문단 편집) === 혼인 등 가족 생활 === 후기 로마군 병사들이 게르만족 출신이거나, 게르만족 여인과 몰래 결혼한 로마 병사가 많아서 게르만족이 침공해올 때 국경이 열려버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3~5세기의 로마 제국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헛소문이다.''' 게르만족들의 침투는 훈족들이 오기 300년 전부터 꾸준히 시도되었고,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가 상대해야 했던 게르만족이 오히려 실력에 있어서도 수에 있어서도, 훈족 침략 시기 훈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무시무시했다. 그런데도 로마군이 적어도 4세기 때까지 족족 야만족을 격퇴한 것은, 로마군에 입대한 게르만족이 민족 정체성보다 국가 정체성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로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면서 출신 민족에 관계없이 로마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이후 상당수의 게르만족이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군에 복무했다. 그 이전에도 하사받거나 로마 시민의 양자로 들어가 취득하는 등 여러 경로로 로마 시민권을 얻어 로마군에서 병사와 장교로 근무한 게르만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로마군에 복무하는 게르만족이 응당 국경 너머 게르만족에게 국경을 열어줬을 거란 생각은 부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다른지 분간을 못해 생긴 착각이다. 당시 로마군에 복무하던 게르만족은 물론 자기가 프랑크족 혹은 고트족 출신이라는 정도의 민족 자각은 있었지만 적으로 싸우게 되는 게르만족은 다른 로마군과 다를바없이 적대시하여 사정없이 쳐죽였고 그건 설령 자신과 족속이 같아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6세기 중엽 쳐들어온 롬바르드족 이전까지 게르만족들도 겉으로는 동로마 황제의 신하를 자처하며 사실상 로마인 행세를 하였다. 서로마가 무너진 건 혼란기에 사회 인프라를 유지하는 것보다 검술을 배우는 게 더 유리한 풍조가 서서히 자리잡고, [[고트 전쟁]]과 뒤이은 롬바르드족의 침략, 이슬람 세력의 침략, 동로마와 노르만 세력의 충돌, 유럽 통일 강국들의 충돌 등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면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회 붕괴까지 이어진 탓이지, 게르만족이 5세기에 로마 제국 사회를 부순것만으로 망한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로마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동고트 왕국]] 시기까지 서로마의 게르만족은 사실상 로마인이나 다름 없었고 오히려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에 인해 유지되던 [[서로마 제국]]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킨건 사실상 [[동로마 제국]]이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이에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시기의 군제 개혁 때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시켰는데, 군인들을 민간 사회와 격리해 군대에만 집중하게 하며, 사적인 가족이 없이 군대를 가족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한 정책 + 가족이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시킬 때 가족들을 데려가는 문제로 골치가 아파질 게 뻔하니 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미 결혼한 기혼자도 입대는 가능했지만 가족관계는 법적으로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결혼 금지를 결혼식 금지로 알아들었고, 공공연하게 주둔지 근처에 사는 현지 주민이나 여자 노예와 살림을 차리고 애낳고 가족을 꾸려, 정식 결혼은 못 하지만 사실혼 관계로 살았다. 물론 군단장들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애초에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고, 또 군복무를 성실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사실상 묵인했다. 여기에다 제국이 안정된 이후에는 대규모 부대 이동이 거의 사라졌기에 두번째 문제의 발생 가능성도 낮아졌다.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에 더해 필요한 이유 중 하나의 감소로 인해,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는 이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기혼 남성들과 같은 법적 권리를 보장하게 되었으며, 또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군인들이 사실혼 관계 중 낳은, 법적으로는 사생아인 아이들도 합법적인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속권 등의 법적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적법한 자식, 부계 친척이 먼저 권리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혼 풍습 때문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선 로마군 3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군단 주둔지까지 쳐들어온 게르만족이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는 군인 가족들을 붙잡아 끔찍하게 살해하는 뜻밖의 참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많은 부분에서 병사 및 사병 가족들에 대한 제한 조치가 철폐됐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병사들의 불만을 산 결혼 금지령이 폐지됐다. 세베루스 아래에서 로마 사병의 자녀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 조치를 보다 전문적으로 강화됐고, 혼외자들의 재산상속도 인정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아래에서는 아예 황제와 황제 자문회의 차원에서 병사 및 군인 가족들에 대한 법적 권한과 지위가 보장되도록 여러 조치가 취해졌다. 우선적으로 실행된 것은 병사와 가족들이 기지 근처에서 상관 및 그 가족들의 명령에 따라 허드렛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보호받는 법령이 제정된 일이다. 이는 병사들이 군율 위반,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마구잡이로 상관에게 잡업에 시달리는 일을 막고, 사실혼 관계와 다름없는 애인, 배우자 및 자녀들까지 지휘관 밑에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이와 함께 병사들이 징계를 받을 때, 법적 외의 사적, 군단 사정에 따른 내부규정에 따라 모은 재산을 강탈당하는 것도 막고, 이를 병사와 유가족들이 재판을 통해 이를 보호받을 수 있게 하는 법률도 제정됐다. 이를 통해 병사 가족들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즉시 소송을 걸어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의 또 다른 변화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집행된 사실혼 관계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재산상속권이 강화하고, 인지 통보를 하면 유언장을 통해 혼외자들의 재산상속도 인정된 조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세베루스 왕조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직계의 단절과 시리아 에메사 여인들의 지나친 간섭으로 병사와 군단기지에 거주하는 군인가족들에게 지지를 온전히 받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