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디핑 (문단 편집) === [[국민혁명]]과 [[반장전쟁]] === [[쑨원]]에 의해 상군총지휘관에 임명되었으며 1924년 대원수 대본영 금연독판, 건국상군 제2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민혁명]]에 참여하여 국민혁명군 2군 부군장으로 [[국민당의 1차 북벌]]에서 활약, 중로군의 강우군에 소속되어 탄옌카이를 대신하여 2군 군장을 대리했다. 강소, 절강으로 진격하여 [[쑨촨팡]], [[장쭝창]]의 병력을 몰아내고 상하이,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사건]] 발생 이후 [[허잉친]], [[청첸]], 하요조와 함께 난징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이후 청첸의 6군과 함께 송호 지역의 수비를 맡았는데 공산당원 임조함이 당대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2군 안에서는 반장, 좌경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2군을 믿지 못하고 40군장 하요조에게 난징위수사령을 맡겼다. 이후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1927년 12월, [[바이충시]], [[청첸]] 등과 연명으로 광동파 위원의 4중전회 출석 반대를 통전하고 [[왕징웨이]]를 [[장황사변]]과 [[광저우 폭동]]의 배후자로 지목하여 체포하라고 요구하였으며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 국민혁명군 4집단군 제2군 군장 겸 1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5월 반장파였던 [[청첸]]이 [[장제스]]에게 항복한 이후 호남성 정부 주석에 임명되어 호남, 강서 지역의 공산당 토벌에 나섰고 [[계계군벌]]을 견제하기 위한 장제스의 의도에 따라 많은 군비와 무기를 지원받았는데 이 때문에 [[탕성즈]] 토벌 이후 양호 지역을 장악했던 계계군벌의 적으로 찍히게 된다. 10월 8일, 18사단장으로 재임명되었다. 급기야 1929년 2월 21일 우한정치분회 주석 겸 군사참의원장 [[리쭝런]]에게 50사단장 담도원과 결탁하여 군비를 유용했다는 혐의로 무단해임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호남 사건]]이다. 루디핑은 군비지급을 통해 이를 유화적으로 처리하려 했으나 [[계계군벌]] 섭기와 하위의 공격을 받아 장사에서 퇴출당했고 강서성으로 밀려났다. 국민정부는 리쭝런이 임명한 35군 군장 [[허젠]]을 새로운 호남성 주석으로 인정하면서 사건을 유화적으로 처리하려 했으나 리쭝런이 저항하면서 [[1차 장계전쟁]]으로 번졌고 결국 [[반장전쟁]]이 폭발했다. 4월 4일 우한이 국민정부에게 탈환된 이후 4월 15일 우한위수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