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브르 (문단 편집) == 역사 == * [[https://www.youtube.com/watch?v=JkPcA8dngB4|루브르의 변화 과정]] * [[https://brunch.co.kr/@archicitystory/6|루브르궁 800년의 역사]] 크기가 이렇게 큰 것은 과거에 [[왕궁]]이었던 곳을 개조한 것이기 때문. [[1202년]]에 [[필리프 2세|국왕 필리프 오귀스트]]가 이곳에 성채를 축조한 데서 비롯되었고 14세기 [[샤를 5세]]의 시대부터 왕궁으로 쓰였다. [[1527년]] [[프랑수아 1세]]는 중세의 루브르 성 [[개조]]를 계획, 전부를 헐어버리고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궁전]]을 세울 것을 결정, 피에르 레스코와 장 구종이 설계를 담당, 레스코가 현재의 살 데 카리아티드(여인 기둥의 방)와 국왕의 2층 거실을 세우고 내외의 조각 장식은 장 구종이 담당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s_Tr%C3%A8s_Riches_Heures_du_duc_de_Berry_octobre.jpg|width=100%]]}}} || ||<#fff> '''프랑수아 1세가 허물기 전 루브르 궁의 모습'''[* 베리 공의 기도서 중 한 장면이다.] || 이후 [[1563년]]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왕궁의 서쪽에 [[튈르리 궁전]]을 세웠고 이후 [[앙리 4세]] 시대에 걸쳐 센강 연변에 ‘물가의 장랑’이라 불리는 그랜드 갤러리(그랑드 갈르리)를 증축하여 루브르와 튈르리 두 궁전을 연결시켰다. 이후 이 회랑은 주로 궁정의 화가·조각가·공예 작가 등의 주거지 겸 [[공방]]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624년]] [[재상]] [[리슐리외]]는 건축가인 자크 르메르시에에게 명하여 루브르 궁 확장 공사를 시행하였다. [[1641년]] [[루이 13세]]의 명의로 니콜라 푸생과 그 제자들이 그랜드 갤러리에 신화를 소재로한 [[벽화]]의 연작을 시도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완성되었고, [[1661년]]의 [[화재]] 후, 왕의 거실과 남쪽 복도를 연결하는 프티 갤러리가 재건되고 르 블랑과 그 제자들이 내부장식을 하였으며, 그후 이 [[갤러리]] 천장 중앙에 [[외젠 들라크루아]]가 『피톤을 퇴치하는 아폴로』를 그렸다. [[1664년]] [[루이 14세]]의 재상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루브르 궁을 프랑스 왕의 주요 궁전으로 할 것을 결의, 설계를 위촉하고 기초석도 놓았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왕의 관심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치우쳤으므로 루브르 궁 계획은 일단 마무리되고 [[1674년]]에 페로의 안을 채용하여 일단락 지어졌다. 이후 루브르는 프랑스 왕실이 후원하는 예술가들의 주거지로서 파리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면서 1793년 8월 루브르는 국민 의회의 결정으로 궁전에서 미술관으로 개장,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국을 선포,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루브르 박물관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후 루브르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약탈품과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려는 유럽 각지의 왕실로부터 기부받은 예술품들로 더욱 화려하게 채워졌다. 또한 여러 건축가들에 의해 루브르에는 수축과 새로운 장식이 가해졌으며 루브르와 튈르리 사이에 카루젤 개선문이 세워졌다. 이후 제 1제정이 붕괴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위를 되찾았고, 루이 18세는 [[베르사유]]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루브르에 있게 되었고, 이후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를 몰아낸 오를레앙 왕가 또한 루브르에 기거하면서 퇼르리 북쪽에 회랑을 증축해 루브르와 연결시키려고 했으나 [[1848년]] [[2월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무산되다가 [[1852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한 제 2제정이 들어서면서 파리 개조 계획의 일환으로 루브르 궁 완성을 계획하였으나, [[1853년]] 처음 설계자인 위스콘티가 사망했으므로 루푀르에게 명하여 위스콘티안에 다시 살을 붙여 [[1857년]]에 완성하였다. [[신관]]은 [[이탈리아]] 풍의 힘찬 조소성, 웅대한 돔 형인 망사르 지붕의 파빌리온 군의 장관으로 [[보자르|제 2제정]] 양식의 대표작이 되고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1863년]]에 시공되어 [[1868년]]에야 센 강변에 남쪽 갤러리가 개축되었다. 1871년 [[파리 코뮌]] 시기 화재 피해를 입었으며 1884년 재개장을 거쳐서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