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쉰 (문단 편집) == 기타 == * 그의 이름을 딴 루쉰문학상은 마오둔문학상[* 81년 제정된 마오둔문학상은 장편소설 문학상이다. 4년마다 수상자를 발표한다. 현존하는 중국 문학상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과 함께 중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루쉰문학상은 종합 문학상이다. 장편소설과 중·단편소설, 번역, 시 등 4개 부문을 3년마다 시상한다.[[https://news.joins.com/article/3074114|#]] *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인 [[모옌]], [[옌롄커]], [[위화]]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다. 위화는 "루쉰의 중국 사회에 대한 조롱을 보면 매우 유쾌하다"며 "루쉰이 아직 살아 있다면 차도 마시고 담배도 피면서 함께 이야기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중어중문학과]] 학생들에게는 [[끝판왕]]급 인물이다. [[국어국문학과]]의 [[정철]], [[영어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 [[일어일문학과]]의 [[나쓰메 소세키]], [[독어독문학과]]의 [[괴테]], [[불어불문학과]]의 [[빅토르 위고]], [[노어노문학과]]의 [[톨스토이]], [[서어서문학과]]의 [[세르반테스]] 같은 존재. 중문학도들에게 도저히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루쉰이다.[* 그 외에는 [[이백]], [[두보]], [[소동파]], [[한유]], [[조설근]]. 현대로 넘어오면 [[천두슈]], 라오서, 저우쭤런, 선충원 등이 있다. 이 작가들 중에서도 루쉰의 비중은 독보적이다.] 중문학과 학생들은 루쉰 소설을 읽지 않고는 전공 수업을 들을 수가 없는 급이다. 왜냐하면 중국 근현대문학사를 다루는 모든 전공 수업에서 그의 출현 빈도가 엄청나게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문학과 학생들에게는 너무 자주 나오다보니 악몽과도 같은 인물이다. * 해외소설을 대거 [[연환화]]로 만드는 작업에 나선 적이 있다. 다만 중국 내에서 연환화 작가는 일반적인 만화가와는 따로 취급하는 듯. * 가장 좋아한 [[러시아]] 소설가는 [[니콜라이 고골]]이다. 루쉰은 고골의 작품 '죽은 혼'의 영향을 받았다. * 2012년 루쉰은 중국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10대 작가 중 한명으로 뽑혔다. 이외의 작가로는 [[모옌]], [[김용(1924)|김용]], 한한, 경요, 라오서, 궈징밍, [[조설근]], 바진, 빙심이 뽑혔다.[[http://cxnews.zjol.com.cn/cxnews/system/2013/04/24/016358811.shtml|#]] * 또한 오늘날 중국 대중들에게 가장 위대한 현대 작가 질문을 하면 첫번째로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https://zhidao.baidu.com/question/570841059.html|#]] [[https://zhidao.baidu.com/question/2075110634379030508.html?sort=11&rn=5&pn=0#wgt-answers|#]] [[https://zhidao.baidu.com/question/332648718217877325.html|#]][[https://zhidao.baidu.com/question/52119539.html?qbl=relate_question_2|#]] [[https://www.baidu.com/link?url=33WZv6WWqh6LDiUr0dWxB7B1xRfSpGPF5gHBz-vYq9hGcbbqmgM6Q2mqTUlSiAtaEMg6RkQ9xsxc87rHjkxU8CIJS1SdSD9CHqi2lsA3vBa&wd=&eqid=c9f0296c0001c7a0000000065fda2658|#]] * 생전에 루쉰은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후스]]를 치고, 가장 훌륭한 산문가 셋 중의 하나로 린위탕을 꼽았다. * 루쉰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본래 [[주(성씨)|저우(周)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본명으로 알려진 수런(樹人)은 그가 17세 때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바꾼 이름이다. 루쉰은 그가 작가 활동을 하면서 지은 [[필명]]으로, [[제정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의 소설 <[[루딘]]>의 주인공인 [[청년]] [[지식인]] '루딘'[* 현실의 변혁을 바라는 이상주의자이지만 막상 현실의 행동에서는 무력감을 나타내는 인물로 1840년대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http://bookcosmos.mk.co.kr/Sub/Digest/GuideBook.Asp?book_sno=5050025|*]] 또다른 설로는, 루쉰 생전의 절친이었던 쉬서우장(许寿裳)이 말하기를 자신이 루쉰에게 필명에 대해 물어봤고 루쉰은 루(鲁, 노씨)가 어머니의 성씨고 쉰(迅)은 자신의 아명이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필명을 지음으로서 "우둔하지만 빠르다(愚鲁而迅速)" 라는 의미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 생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 다른 근현대 중문학의 중요한 인물 궈모뤄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나팔수’였던 반면, 루쉰은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차이는 궈모뤄가 [[희곡]]에 공을 들인 [[극작가]]이기도 했으나, 루쉰은 희곡을 쓰지 않았을뿐더러 [[연극]]을 증오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 루쉰에게 두 동생이 있었는데 훗날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큰동생 저우쭤런(주작인(周作人), 1885~1967)은 루쉰처럼 문학을 공부했으며 신문화운동에도 함께 참여한다. 저우쭤런은 문학이론가,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그 명성은 훼손된다. 전쟁으로 [[베이징]] 등 주요 도시의 일본군이 진주하자 [[베이징대]], [[칭화대]] 등 많은 대학의 교수들은 협력을 거부한 채 낙향하거나 [[쿤밍]]에 세워진 시난연합대학으로 강단을 옮긴다. 그러나 베이징대에서 일하고 있던 저우쭤런은 베이징에 남아 베이징대 총장, [[왕징웨이]] 정권의 교육청 독판(교육부 장관)을 지낸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기도 한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1남 2녀를 얻었는데 전쟁 중 보여준 그의 친일적 행보로 인해 종전 직후 [[국민정부]]는 저우쭤런을 [[한간]]으로 처벌했다. 14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했는데 같은 [[친일]] 한간으로 총살당한 [[딩모춘]]을 기리는 시를 썼다가 더 욕먹어야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한간이라고 욕먹으며 복권되지 못한 채 1967년 삶을 마무리해야 했다. 반면 1888년생으로 막내인 저우젠런(주건인,周建人)은 생물학을 공부했는데, [[국공내전]] 중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중공 수립 이후 고향인 [[저장성]]의 성장과 교육부 부부장,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등 여러 요직을 맡으며 존경받다가 1984년 만 95세로 눈을 감으며 장수했다. * [[후스]] 등과 함께 [[한문]] 대신 상대적으로 쉬운 [[백화문]]을 쓰자는 [[백화운동]]을 벌여 중국에서 한문을 몰아내고 북경어 백화문에 기반한 [[표준중국어]](글말)를 쓰게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본인부터가 문학작품을 한문이 아닌 백화문으로 썼다. * 루쉰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57년에 누군가가[* 루쉰의 아들 저우하이잉이 쓴 '나의 아버지 루쉰'(2008, 도서출판 강)의 에필로그에 따르면 저우하이힝의 어머니 쉬광핑의 친구이자 번역가였으며 루쉰을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진 뤄지난이라는 인물이다.] [[마오쩌둥]]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만약 루쉰이 살아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마침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던 무렵이라 문화계 인사들의 행로가 화제에 올랐는데 마오쩌둥이 상하이를 방문한 틈을 타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 '''"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 * 자기 나라의 [[중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인을 이기적이고 [[허세]]와 [[정신승리]]를 잘 드러내며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고 쓸데없이 외래문화에 배타적이라고 주장했다.[* 서성, '한권으로 읽는 중국문화', 넥서스, 2005, p30] 루쉰이 생각한 중국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아Q정전]]〉이다. 그런 시각에서 한자 폐지 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다. > 漢字不滅,中國必亡。 >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 *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작 외국인이 중국인을 이렇게 비판하면 그건 또 싫어했다. [[펄 벅]]을 비난하고 그녀 대표작인 《[[대지(소설)|대지]]》를 비난한 것도 바로 루쉰이다.''' 펄 벅의 경우 당시 서구(특히 미국) 문단에서 대표적인 중국통 작가로써 긴 중국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실상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글을 많이 저술했다. 《[[수호전]]》 등의 중국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중국의 문화적 전통을 서구에 널리 알리고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근거없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비하하던 당시 서구의 태도에 일침을 가했으며, 그러한 비하적 태도를 가진 이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중일전쟁]]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면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평생에 걸쳐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벅에 대한 루쉰의 이런 박한 평가는 좀 너무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루쉰이 이와 같이 벅에게 적대적인 대응을 보인 이유는 크게 2가지 정도로 지적되는데, 1) 벅의 작품에는 [[리얼리즘]] 관점에 따라 중국인 대중의 어리석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부분도 적지 않고, 이러한 부분에 대해 루쉰은 (자기 자신도 그런 어리석음에 치를 떠는 입장이긴 했지만) 국외자인 벅이 중국인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는 설이 있고, 2) 하필 루쉰이 구해 읽은 《대지》가 [[중역]]본이라서 중역으로 인한 의미 왜곡으로 벅이 반중적인 작가라고 오해했다는 설도 있다. 이 중 1)의 설, 즉 중국인 자신이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 중국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는 설의 경우 흥미로운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대지》의 3부 분열된 일가를 보면 주인공격인 왕옌이 미국 대학에서 중국 농민으로 분장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공연한 중국인 학생들을 보고서 '중국인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격분하여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대지 1부의 출간 이후 한국의 재미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였던 [[강용흘]]이 왕룽이 이화를 돈으로 사서 첩으로 삼는 장면을 두고 '중국에는 이런 일이 없다'고 벅이 중국인의 도덕적 품성을 비하했다고 공격하다가 '중국에서 만난 노부인들이 자신들이 실제로 겪은 일을 들려준 증언에 기반한 내용'으로 그저 '원론적인 도덕론을 내세워 분명 [[역사왜곡|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려는 태도]]는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우월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처참하게 역관광당한 사례가 있다.[* 이 사건 덕에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강용흘이 영미권 독자들에게는 '펄 벅한테 뻘소리하다 개털린 놈'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강용흘이 '중국 만쉐 [[하악하악]]'이라고 중국을 두둔한 게 아니라 당시만 해도 동아시아를 중국과 일본도 구별못하고 지금도 서구권에서 [[닌자]]가 중국 것인지 아는 이들도 여전히 많은 것처럼 그 때는 더했기 때문이다. 한국 옛날 이야기와 문화를 글로 써서 대중적까지 아니라도 미국 문학계에 알린 강용흘이었으니 《대지》에 담긴 중국인 이미지가 이웃 한국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여겼던 걸 우려했기에 이런 두둔을 했으나 결론은 이렇게 되면서 오히려 한국인들도 종종 중국 두둔이나 한 친중 색퀴라고 안 좋게 보는 시각도 있다.] 중국이나 한국의 유교적 도덕 원칙과는 별개로, 실제로 최근까지 매매혼이나 축첩이 있던 것 자체는 부정하기 힘들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비판이나 풍자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의 문제이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사건에서 '우리는 샤를리 엡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인 서구 지식인 중 하나였던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만화)]]》의 작가 [[조 사코]]의 '가끔 어떤 집단은 조그만 풍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발언처럼, 방어적인 입장에 몰린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한 조그만 풍자나 비판에도 격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서구 열강[* 및 그 워너비인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문화적인 비하에 시달리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향한 비판이 설령 사실에 근거하고, 정당성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루쉰 자신 역시 펄 벅이 지적한 문제와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비판하고 있었음에도, 외국인[* 그것도 침략의 주체이던 서양인-설령 성장기를 중국에서 보내 중국에 대해 친근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더라도]이 이를 지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었다. 이게 꼭 루쉰만의 문제도 아니고, 루쉰을 존경하는 인물로 유명한 [[리영희]]가 젊은 시절 [[미국]]으로 교육연수를 받으러 겪었던 일을 회상한 일화 중에 미국 언론이 [[북한]]에 호의적인 기사를 싣자 동료들이 해당 언론사에 항의하러 몰려갔고, 해당 언론사의 책임자는 [[한국]] 언론인들이 해당 기사에 항의하러 몰려온 것을 보고 '거짓이 아닌 이상 언론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냐'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좋은 기삿거리가 있으면 가져오라. 그러면 실어주겠다'고 타일러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생전에 [[리영희]]가 매우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자서전 격인 《[[대화]]》를 보면 루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한국 한자음]]인 '노신'으로 읽지 않으면 느낌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 루쉰 전집의 정장 기념본 초판은 200질만 만들었는데 예전부터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저우언라이]]가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에게 선물해 줄 한 질을 구하지 못해 애먹었을 정도다. 마오쩌둥 역시 한 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 중국엔 루쉰문학관이 6개나 있다. [[베이징]]·[[상하이]]·[[사오싱]]·[[난징]]·[[광저우]] 등에 루쉰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 중에서 사오싱이 가장 크고 볼거리도 많다. 사오싱은 루쉰의 고향으로, 루쉰 생가 일대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다. 심지어 단편 ‘공을기(孔乙己)’에서 주인공 ‘공을기’가 자주 들락거린 식당 ‘함형주점’(咸亨酒店)도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다음으로, 상하이가 볼 만하다. 상하이는 말년의 루쉰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루쉰이 숨진 곳이기도 하다. 문학관 2층 입구 벽에 ‘뭇사람의 비판에 차갑게 대하고 고개 숙여 민중의 소가 되겠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루쉰 산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1942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옌안(延安)강화’에도 등장하는 문구다.[[https://news.joins.com/article/3074114|#]] * [[다자이 오사무]]가 루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석별〉(惜別)을 발표한 적이 있다(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일본유학 시절의 루쉰의 모습을 회고하는 형식. 문제는 이 소설이 쓰여진 것이 일본이 한창 전쟁 막바지에 다다랐던 [[1945년]]이었고, 집필 동기도 전시 어용문인 단체인 문학보국회[* 국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거나 전쟁터에서의 [[옥쇄]]를 찬미하고 승전을 축하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업무였다.] 의뢰를 받아서 지어진 소설이다. 실제로 다자이는 1944년 1월 30일에 도호 영화사 프로듀서 야마시타 료조에게 쓴 편지에서 "새해가 되자마자 문학보국회에서 대동아 5대 선언을 기초로 한 소설을 쓰라는 어려운 명령을 받아, 이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다른 일을 제쳐두고 이 일에 매진하는 중입니다."라고 밝혔다. 소설 후기에서도 "써달라는 의뢰가 없었어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료를 모으고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자이 자신이 당시 일본문학보국회에 소설 개요를 제출했던 소설가 50명 가운데 선발된 6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본문학보국회의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평론가들은 작품에 그려진 루쉰의 모습과 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지극히 피상적이라면서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간주했다고.[* 출처: 다자이 오사무 전집 제6권 '쓰가루', 도서출판b, 2013년] * [[윤봉길 의거|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 의거]]로 우리에게 유명한 홍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다. 공원 내부에 루쉰기념관도 같이 있다. * [[이육사]]가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기도 했다. * 루쉰의 일기를 보면 루쉰은 하루에 대단히 많은 양의 글을 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루쉰은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태도로 쉼 없이 일했다.[* [[마오쩌둥]]은 루쉰을 두고, 식민 중국사회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경골(硬骨)’이라고 했다.] * 중국의 소설가 [[위화]]는 수필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한 친구와의 사소한 논쟁에서 불현듯 떠오른 "'''루쉰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던 그 친구의 입을 다물게 한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루쉰이 기본적으로 반[[유교]], 반전통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서양으로부터의 혁명 사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텍스트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목적 차원에서 적극 권장될 만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는 위대한 문학인이자 또한 위대한 사상가였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한창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어수선하던 시대'''였는데, 그 서슬퍼렇던 문혁 시절조차 루쉰의 이름이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그러나 개혁과 개방 이후로 점점 [[사회주의]]적인 인력이 약해지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재고가 일어나면서 노신의 위상도 예전보다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무협소설로 이름났던 [[김용(1924)|김용]]도 자신의 《[[천룡팔부]]》 등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보면서 "중국이 서양중심적 문학에서 다시 전통문학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 「와사등」, 「외인촌」, 「설야」, 「추일서정」등으로 수험생들에게도 익숙한 시인 [[김광균]]이 「노신」 이라는 시를 썼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인이자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 해야하는 가장이기에,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시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화자는 노신을 떠올리며 그가 굳은 결심으로 고난를 헤쳐나간 것처럼 마음을 다잡는다. [[파일:루쉰 구글.jpg]] * 2011년 루쉰 탄생 13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나왔다. [[파일:북대최초로고.jpg]] * [[베이징대학]]의 로고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파일:A_sticker_about_Lu_Xun.png]] >번역: >[[위키백과]]는 쓰레기야! —루쉰 >나 그런말 한적 없어. —루쉰 * 중국에서는 [[지식인]]의 상징같은 인물이기도 하고 많은 명언을 남긴 인물이라 그의 이미지에다가 [[명언/가짜|출처가 불분명한 명언]]을 써놓기도 한다.[[http://www.chinanews.com/cul/2017/11-17/8379501.shtml|#]] * 루쉰은 [[삼국지연의]]를 "[[유비]]의 후덕함을 나타내려 했으나 오히려 [[위선자]]처럼 되어버렸다."고 평가했다 * [[사기(역사책)|사기]]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 [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라고 극찬했다. 또한 [[홍루몽]]을 《홍루몽》이 나타난 이후로 전통소설의 모든 사상과 작법이 타파되었다.”라고 평했다. * 루쉰에 관심이 있다면 먼저 루쉰의 전기나 평전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읽을 만한 루쉰의 전기나 평전이 꽤 출간되어 있다. 일반 독자들이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왕스징(王士菁)이 지은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다섯수레, 1992)를 권한다. 1949년 초판이 발행되었던 터라 다소 딱딱하고 경전화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루쉰의 인간적인 면모를 맛보고 싶다면 루쉰의 아들 저우하이잉(周海O)이 지은 <나의 아버지 루쉰>(강, 2008)을 읽는 게 좋다. 루쉰의 자질구레한 가정사로부터 문단의 일사까지 두루 맛보는 재미가 있다. [[파일:thumb_2949993309_7IaOTHeF_02.jpg]] * 광저우 [[황허강]] 72 [[열사]] 공원 묘지에는 (왼쪽부터) 광저우 출신인 [[홍수전]], [[쑨원]], 루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그가 80년 전 쓴 편지 한 통이 2013년 경매에서 약 12억원에 [[경매]]에서 낙찰되기도 했다. 21일 중국 청두상바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6일부터 닷새간 열린 자더 경매에서 루쉰이 1934년 6월 8일 쓴 220자 분량의 '타오캉더에게 보내는 편지'가 655만 5,000위안(약 11억 5,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원래 감정가인 180만~220만위안보다 3배 높은 가격이다. 한 글자당 가치가 3만위안(약 520만원)에 달하는 셈이다.[[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3/11/1164719/|#]] * [[2019년]] 루쉰의 말을 인용한 [[트위터]] 계정이 폐쇄됐다고 보도 됐다. 중국에서는 현재 트위터가 차단되고 있지만, 중국의 많은 사용자들이 [[VPN]]을 사용하여 [[SNS]]에 접속하고 있으며, 2018년 중국 관리들은 그것의 사용을 점점 더 단속하여,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게시물을 검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루쉰의 말을 인용한 @luxunbot25라는 사용자는 트위터에 선전 경찰이 자신과 대화할 것을 요청했다고 Quartz는 보도했다.[[https://lithub.com/china-has-censored-a-twitter-account-posting-quotes-from-the-father-of-modern-chinese-literature/|#]] * 2020년대에 중국의 청년실업률이 20%를 넘길정도로 심각해지면서 단편소설 쿵이지(공을기 孔乙己)가 재조명을 받아 큰 인기를 끌고있고, 패러디 문학도 유행하고 있다. 대학정원 증가와 교육열로 대학에 진학하는 청년들은 크게 늘어났지만, [[야간자율학습]]과 과도한 [[사교육]]까지 받으며 밤 늦도록 공부하고, [[가오카오]] 시험을 뚫어서 어렵사리 대학 졸업해도 질 좋은 일자리는 경제성장률 저하로 그만큼 증가하지 않아서, 기대했던 대기업이나 공무원에 취직하기는 더럽게 힘든데, 그렇다고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공장에서 일하거나, 건설직에서 일하는것을 대학에 간 매몰비용이 아깝다며 기피하거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좋은직장에 취직하라고 닦달거리면서 별수 없이 가망이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대기업에 입사 지원서를 수없이 내거나 합격률이 매우 낮은 공무원 시험에 인생을 걸며 응시하고 낙방하는것을 반복하거나 그마저도 포기하고 별수없이 저임금직이나 3D업종이라도 취직해서 비싼 생활비를 감당하는 모습을 과거 시험 장수생인 쿵이지에 비추며 풍자하거나 자조하는것이다. 이런 패러디 글들을 '쿵이지 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 당국에서 이런글을 삭제조치하기도 하지만, 취업난이 해소된것도 아니고, 당국에서 제공하는 일자리가 땜빵용이라 대체적으로 질이 낮기 때문에 회자자체는 계속 되는 중이다. 같은 중화권인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에서는 예전에 겪어왔던적이 있거나 겪고있는지라 딱히 특별하지 않다는 반응이다. 루쉰은 쿵이지를 통해 오랜시간 존속했다가 폐지된 과거시험에 목숨을 걸다가 몰락한 지식인이 밥벌이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체면만 차리는 모습을 풍자했다.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서 몰락한 주인공 쿵이지는 매우 궁핍하며서도 고급 문체를 남발하고 지적 허세를 부리지만 돈벌이를 하거나 신체 노동은 하지 않는다. 선비 신분을 상징하는 낡은 장삼을 끝내 벗지 않고 다니지만 결국 생계를 위해 도둑질까지 하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종적을 감춘다는 식의 내용이다. 한국으로 치면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과 비슷한 작품인 셈인데,[* 다만 공을기는 구시대 지식인을 풍자한 반면에 반면에 레디메이드 인생은 신교육을 받으면서도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기는 커녕 곤란을 겪는 지식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풍자한 작품이라는것이 다르기는 하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많이 실린 작품인지라 인지도 자체는 높았고, 종종 패러디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