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쉰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루쉰(魯迅)은 1881년 9월 25일(음력 8월 3일), 절강(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성내(城內)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저장성]] [[사오싱시]].]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字)는 예재(豫才)로, '루쉰'은 데뷔작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했던 필명이다. 루쉰 집안의 조상들은 원래 호남성(湖南省) 도주(道州)에 살았으나, 루쉰의 14대조 때에 농민으로 소흥에 이주했다고 한다. 루쉰의 집안은 이 때부터 부유해지기 시작했지만, 루쉰이 태어난 당시에는 약간의 논밭과 점포를 소유하고 조부가 한림편수(翰林編修)로서 [[베이징]](北京)에 나아가 관리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봉건 소지주 가정이었다. 루쉰은 6세 때부터 가숙(家塾, 집안 내 글방)에 들어가 초보적인 독서를 하며 공부를 시작했고, 7세 때에는 싼웨이수우(三味書屋)라는 사오싱의 사립학교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 때 그의 스승은 서우징우(壽鏡吾)라는 사람으로 고전 한문으로 쓰인 루쉰의 첫 단편에서는 소년기 경험을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수 년 동안 서우징와 연락을 유진한 것으로 보아 그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루쉰은 [[사서오경]]을 다시 읽고 시집을 배우는 등 전통적인 과거 공부도 계속했다. 루쉰은 한시의 운율 맞추기에 능숙했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작가로서 후기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루쉰의 할아버지는 다소 진보적인 성향으로 루쉰에게 소설, 이야기, 잡문 등을 읽도록 권유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독서지도 또한 다소 파격적이어서 중국 고전 중에서도 [[두보]]와 한유를 건너뛰도록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1세 때에는 서당 격인 삼매서옥(三昧書屋)에 들어가 수경오(壽鏡吾)라는 선생에게 사사하였는데, 동시에 집에서도 계속해서 증조부에게 글을 배웠다. 유년시절의 루쉰은 근면한 편이었으며, 가숙이나 서당에서의 규정된 공부 외에도 중국의 고서와 야사 등을 즐겨읽었고, 조부나 유모를 통해 듣던 중국의 민간전설과 설화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외에도 어린 시절의 루쉰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안고촌(安稿村) 외가에서의 생활이었다. <사희>(1922)에는 그 무렵의 생활이 회고되어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루쉰은 어린시절 여름철에 외가에 놀러 갔다가 마을 소년들과 천진난만하게 놀던 일화를 선명하게 서술하고있다. 작품속에서 그는 이 시절을 "그곳은 내게 있어서 천국이었다. 모두들 나를 오냐오냐 해주었고, 질질사간(秩秩斯干), 유유남산(幽幽南山)(《[[시경]]》의 한 구절)같은 것을 외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하기도 하였는데 이 곳에서 생활할 시절의 루쉰은 마을 어디를 가나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문가의 [[도련님]]이었다. 루쉰은 뒷마당 정원에서 [[귀뚜라미]]를 잡고 식물을 기르기도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곳은 루쉰에게 엄격한 공부로부터의 안식처였다. 왕샤오밍(1992)에 따르면 그는 대담하면서도 놀이에 대한 감각을 지닌 명랑한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때때로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여름을 보내면서, 마을 농부의 아이들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연극을 보러 가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유복한 생활은 루쉰이 12세가 되던 해 조부가 투옥되고 그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아눕게되자 뒤바뀌고 만다. 루쉰의 할아버지 저우푸칭은 과거 급제자였으나, 루쉰의 아버지는 지방과거에 번번이 낙방했다. 이 때문에 저우푸칭은 시험 관리에게 뇌물을 바쳐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키려고 하였는데, 뇌물을 전달하기 위해 보낸 하인이 바보같이 영수증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뇌물죄가 드러나고 만 것이다. 저우푸칭은 체포되어 [[항저우]]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후 감형되어 1901년까지 수감되었다. 루쉰은 연좌를 피해 시골로 내려보내졌다. 루쉰의 집안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몰락하게 되고, 루쉰은 아버지의 약값을 대고 치료에 필요한 약을 구하기 위해 매일같이 전당포와 약국을 드나들게 된다. 훗날,(일본에서 현대 의학을 배운 이후) 루쉰은 그 고생이 속임수같은 [[한의학]]때문이라고 술회하는데 그 회고담은 그의 첫 작품집인 <납함>(1923)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창작집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명천>(1920)은 바로 그 기억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uXun_-_youth.jpg|width=100%]]}}} || >누구든지 먹고 살 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몹시 어려운 처지로 떨어지게 된다면, 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 자서(自序)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3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루쉰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였고 장남이었던 루쉰은 새로운 삶의 출로를 찾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의 타격은 뒷날 루쉰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이 아니고 갑작스럽게 집안이 몰락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낙원의 상실은 루쉰에게 굴욕감과 강한 인상을 남겼다. 루쉰의 작품 세계에서 보이는 깊숙한 비애와 어둠은 주로 그의 불행한 소년기에 키워진 비관적인 정서와 의심적인 기질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개인적 환경은 당시 [[중국]]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루쉰을 [[입신양명]]을 꿈꾸던 명문댁 도련님에서 열렬한 문학혁명의 [[전사]](戰士)로 변모시켰다. 루쉰이 살던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근 백년 간 중국의 역사는 [[영국]]을 선두로 하는 서양 제국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로 떨어지는 과정이었다. 또한 동시에 중국민족이 그러한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해방사이자, 열강을 따라 잡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루쉰의 전 생애와 맞물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중국사회는 암흑의 구름으로 뒤덮인, 절망의 시대였다. 아편전쟁 이후 계속 심화되어 온 정치, 사회적 혼돈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중국 사회와 중국 민족은 단말마(斷末魔)의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던 것은 중국 봉건사회의 유교적인 폐습이었다.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 내의 폐단으로 인한 국민성의 후진성이야말로 근대화의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인]]들을 더 깊은 나락의 절망 속으로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국민정신을 계몽하고, 개선하기 위한 문화운동이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고, 1919년 [[5.4운동]]이라는 문화혁명(신문화운동)으로 심화,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루쉰은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며, '문학'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자기 민족의 낡은 사상과 의식을 불태우고, 시대의 어둠과 절망을 넘어서려고 애쓰던 '정신계의 전사'로서 일생을 일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