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쉰 (문단 편집) === 말년 === 루쉰은 1926년 2번째 소설집인 《방황》을 출판한 이후로는 소설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는 수단으로 문예활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잡문(雜文)을 주로 발표한다. 1926년 3월 18일,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러 모인 시민과 학생을 향해 중국 정부가 발포했고, 루쉰은 류허전을 비롯해 자신의 제자 3명을 잃었다. 가까이서 목격한 첫 번째 살육. 이후 루쉰은 수배자가 되어 도망을 치다가 돤치루이(段祺瑞)가 물러나자 집으로 돌아온다. [[베이징]]에서 산 것도 벌써 16년째. 루쉰은 본의 아니게 유명해졌다. 학자라 호명되기도 했고, 문인이라 호명되기도 했고, 심지어 사상계의 선구자라고 호명되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루쉰은 아니었다. 루쉰은 ‘다시 살고’ 싶어졌고 베이징을 떠나기로 한다. 이때의 나이가 46살이었다. >“글은 지금까지 쓰고는 있는데, ‘글’이라기보다는 ‘욕’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게요. 이제는 나도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 마음이라오. (중략) 근래에는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소. 왜일 것 같소? 말하면 아마 웃을 텐데, 첫째는 이 세상에 아직도 내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 역시 살아서 의론도 펼치고 문학에 관한 책도 좀 내고 싶기 때문이오. (중략) 요즘 내 사상은 이전에 비해 낙관적이 되었소. 그다지 의기소침하지도 않고.” >---- >1926. 6 리삥중에게 보내는 편지/ 린시엔즈 [[8월 26일]], [[베이징]]을 출발한 루쉰은 9월 4일 [[샤먼시|샤먼]](廈門)에 도착한다. 그러나 샤먼은 “제기랄, 오지 말았어야 해”라고 후회할 만큼, 베이징 못지않게, 아니 베이징보다 더 적막했다. 자신을 불러준 친구 린위탕(林語堂)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더 머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샤먼 이후였다. 루쉰과 쉬광핑 사이에 오간 편지를 보면 이 시기 루쉰은 정말 헤맨 것 같다. 돈도 생활도 여자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 역사적 중간물이라는 의식은 어떤 점에서는 루쉰을 자유롭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세월과 더불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한다면 어떤 길이든 나서지 못할 이유도 없다. 루쉰은 쉬광핑이 있는, 그리고 새로운 혁명적 기운이 피어오르는 [[광저우]](廣州)로 간다. 1927년 1월 18일. 광저우에 도착한 루쉰. 시작부터 떠들썩했다. 그는 중산대학에서도 가장 장엄하고 화려한 곳, “대종루(大鐘樓) 위에 떠받들어”졌고, “강당의 짝짝 하는 한바탕 박수”로 전사로 확정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환호와 기대, 방문의 대상이 된 루쉰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밤새 설쳐대는 20마리 가까이 되는 쥐와 새벽부터 고래고래 부르는 ‘노동자 동무’들의 노랫소리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상황이다. 루쉰이 남하할 무렵 [[광저우]]는 붉은 도시였다. [[쑨원]]은 봉건 군벌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해 광저우를 거점으로 삼아 [[중국 국민당]]을 재정비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키며(1924년 1월),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한다.(1924년 3월) 마침내 1926년 7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삼은 혁명군은 봉건군벌을 향해 북벌을 시작한다. 이들은 거침없이 북진하였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강남 대부분의 도시를 탈환한다. 삭막하고 단조로운 샤먼시절, 유일하게 루쉰에게 기쁨을 준 것도 바로 이 [[국민혁명]]의 소식이었다.[* 이 국민혁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는지는 [[김산]]의 <아리랑>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도 [[중국]]의 이 새로운 물결에 감격하면서 중국의 해방이 조국 해방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자진해서 [[광저우]]로 달려갔다. “1925년 가을 내가 광저우에 도착하였을 때 소위 중국 ‘대 혁명’에 뛰어들어 투쟁하기 위해 모인 한국인은 겨우 60명에 불과하였으며, 그 대부분이 [[의열단]]의 테러리스트였다. 그러나 1928년까지 800명 이상의 한국인이 광동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불과 6개월 이내에 [[양자강]] 유역까지 도달한 북벌군의 승승장구하는 급진격이 한창이었을 때 모든 혁명가가 느꼈던 환희와 열광은 지금도 기억해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화북으로! 그리고 조선으로!-우리의 가슴은 미칠 듯이 기뻐 날뛰었던 것이다!”(김산, <아리랑>)] 루쉰은 광저우에 도착한 직후 ‘황화절의 잡감’이라는 글을 쓰게 된다. 황화절은 3·29 광저우 봉기를 기념하는 명절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루쉰은 자신이 사건의 정황을 잘 모르니 자칫하면 글에서 뻥을 치게 생겼다면서 걱정한다. 그래서 "불과 17년 전의 일이니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고 썼다. 고향에서 혁명가 추진(秋瑾)이 죽었을 때도 그랬고, [[베이징]]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제자들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구경꾼’에게 이런 일이란 잠시 애석해하거나 안주삼아 씹어대다가 금방 잊어버리는 일이니까. 하지만 3·29 봉기는 그 자체는 실패했지만 곧 우창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의 성공 덕분에 혁명성공의 선구자가 되어 해피엔딩을 맞게 되었으니 다행이고 경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루쉰의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해피엔딩과 잊히지 않는 것, 그것이 혁명의 성공이냐는 물음이다. 혁명이 성공했다면서 꽃을 꺾거나 과실을 따먹는 사람만이 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길러주는 사람이 없다면 결과가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혁명은 끝이 없고 ‘아직 성공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황화절]]도 하루 정도 떠들썩하면 될 뿐, 그 다음엔 집에 가서 푹 자고 이튿날 “반드시 해야 할 하루 일과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데 루쉰이 직접 광저우에 도착해서 목격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태평]]’이었다. 만약 혁명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더 많은 ‘소리’와 ‘일’들이 벌어져야 할 터. 그러나 광저우에서는 어떠한 조짐도 없었다. 10여 년 전처럼 구시대의 인물은 의연했고, 신문·잡지의 문예도 여전했다. 대신 루쉰이 목격한 것은 거리에 나붙어있는 빨간 천의 구호들, 깃발을 높이 든 노동조합의 행진들, 황화절에 대한 떠들썩한 기념들, 그리고 자신들은 혁명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니 이제 성적이 나빠도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유세를 떠는 학생들의 어필이었다. 구호나 행진이나 기념이나 유세가 혁명이라면 그것은 ‘봉지혁명(奉旨革命)’, 임금의 뜻을 받들어 모셨던 구시대 관습을 리바이벌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루쉰은 엄중하게 경고했다. 구호를 혁명으로 생각하는 한 혁명의 책원지 광저우는 언제든지 반혁명의 책원지도 될 수 있다고.(1927. 12. 17, ‘종루에서’) 한편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국공합작의 약속을 깨고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체포, 살육하는 우익 쿠데타를 감행한다. 곳곳에서 백색테러가 자행되었다. 상해에서만 300명이 살해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4월 15일에는 광저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2,000여 명의 노동자와 공산당원이 체포되고 100여 명이 살해되었다. 2년 전 [[베이징]]에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이번엔 그 살육이 혁명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혁명, 반(反)혁명, 불(不)혁명, 혁명가는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반혁명가는 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불혁명가는 혁명가로 간주되어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반 혁명가로 간주되어 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아무것으로도 간주되지 않아 혁명가 또는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1927. 9. 24, ‘사소한 잡감’) 학생들이 잡혀가자 루쉰은 강하게 항의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중산대학은 ‘당교(黨校)’이기 때문에 정부방침에 반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학교 관계자들. 늘 공리와 대의를 입에 달고 살다가 어느새 장제스의 청천백일기 밑으로 기어들어간 기회주의적 문인들. 이들은 주인보다 더 사나운 ‘발바리’들이었다. 루쉰은 4월21일 중산대학을 사직하고 입을 닫는다.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실함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공허함을 느낀다”(1927. 4. 26, <들풀> 제사)고, 이 때의 , 루쉰은 썼다. 그리고 빠이윈러우(白云樓) 26호 2층. 오후에야 해가 드는 서향의 방 안에서 묵은 원고를 편집하면서 ‘살아있는 시간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냈다. 무덥고 지루한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적막한 베이징을 탈출하기 위해 찾아간 샤먼에서 더 큰 적막에 빠져버렸고, 다시 광저우로 “꿈을 안고 왔다가 현실에 부딪히자 꿈의 세계에서 추방되어 적막만 남았다.” 이것이 바로 1년 사이에 루쉰이 겪은 롤러코스터다. 혁명에 대한 2번째 좌절. 청년들에 대한 깊은 실망. 가을이 되자 루쉰은 아무 미련 없이 광저우를 떠난다. 도착할 때와는 달리 이번엔 조용하게 간다. 1927년 10월 루쉰과 쉬광핑은 상하이에 도착한다. 광저우에 더 이상 머무를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베이징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여 택한 상하이행은 어쩌면 출구 없는 퇴로, 혹은 퇴로 없는 출구다. 당시 [[상하이]]는 [[장제스]] 정권의 제2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웹스터 사전>에 동사 ‘상하이하다=to Shanghai’가 “[[아편]]으로 인해 마비되어, 인력을 구하는 배에 팔려버리다”라거나 “사기와 폭력으로 한바탕 싸움을 일으키다”라는 뜻으로(<상하이 모던>, [[고려대학교]]출판부) 적혀 있을 정도로, 복마전 그 자체였다. 그리고 1927년 [[상하이]]에 와서 193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상해에서의 10년 동안, 루쉰은 2번 베이징을 다녀온 외에는 줄곧 상하이에서 보낸다. 상하이에서 보낸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루쉰은 9권의 잡문집과 역사소설인 《고사신편(新古事編)》을 출간했고, 문예이론, 장편, 단편소설, 동화 등을 번역했으며, 소련과 독일의 신흥목각(新興木刻)을 소개했고, 신문학운동을 제창했으며 세계 언어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행동적인 면에서는 '중국 자유운동 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 등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루쉰의 문학세계는 이 1927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 시대로 분수령을 이룬다. 루쉰의 전기시대가 단편시대라면 후기는 잡감문(雜感文)의 시대이고, 전기가 계몽적이고 사실적인 인생문학이라면, 후기는 사회비판과 문학비평을 전제로 한 정치문학이다. 전기작품에는 전통적인 애수와 낭만 그리고 풍자가 특징이지만 후기작품은 맵고 신 정공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루쉰이 후기에 정치에 관심을 보이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인간혁명, 제도혁명에 전념하게 되고, 비판문학의 영역으로 사상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말년의 루쉰은 중국의 [[막심 고리키]]라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청년 작가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헌데, 실제로 고리키가 죽은 그해에 루쉰도 죽었다. 정확히 고리키가 죽고 4달하고 하루가 지난 다음.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ove_Lu_Xun's_casket.jpg|width=100%]]}}}|| 지병으로 병상에 드러누우면서도 집필을 쉬지 않았던 루쉰은 [[독일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1936년 10월 19일, 향년 55세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항일 통일전선 조직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문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문단을 통일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