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정샹 (문단 편집) === 중화민국 초대 외교총장 ===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되고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탕사오이]] 내각에서 초대 외교총장에 임명되었다. 루정샹은 이때 영어가 유창한 [[옌후이칭]]을 외교차장에 임명할 것, 부서 내의 인사 및 업무를 실행할 때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위안스카이]]의 승낙을 받았다. 외교총장에 취임한 루정샹은 외교부 개혁을 실시, 외교부의 전문화와 조직개편, 전문외교관 충원 및 육성에 노력했다. 루정샹은 프랑스 제도를 참고하여 <외교부조직장정>을 규정하여 1912년 10월 8일에 발표하였고 외교부를 총장 1인, 차장 1인, 참사 2~4인, 비서 4인, 국장 5인, 첨사 8인으로 구성하기로 하였고 외정국, 통상국, 교제국, 서정국으로 나누었다. 루정샹은 이 중에서도 외정사를 중시하여 국계, 자문, 조약, 금령 4과로 다시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전문적 외교 인재 양성을 중시하여 3원칙을 결정하였다. * 1. 외교인원은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 2. 채용 기준은 성의 경계를 타파하고 외국어에 능숙해야 한다. * 3. 외교부 내외의 인사 추천은 이 원칙에 적합하지 않으면 접수하지 않는다. 또한 1915년 외교관영사관고시령을 발표, 외교관 선발 시험을 4개의 장으로 나누어 국문, 외국어, 헌법, 국제겅봅, 국제사법, 오교법, 행정법규,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정치학, 경제학, 재정학, 상업사, 약장성안, 외교사건, 초의문독 과목을 통과해야 외교관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시험을 통과한 외교관들은 외교부서, 해외공관에서 근무하여 외국어와 전문 지식을 수학한 후 분야에 맞는 직무에 종사하게 했다. 그리고 해외 공관 직원들도 앞선 3원칙에 따라서 외교부에서 직접 파견하였고 이로 인하여 우수한 외교관들이 많이 양성되었으며 혼란한 중화민국의 정치상황 속에서도 외교부는 독자적인 분야를 공고히하며 안정적인 부서로 남을 수 있었다. 이렇듯 외교총장으로 루정샹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국민정부 시기까지 승계되어 중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6월 17일 [[탕사오이]]가 [[위안스카이]]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사직하자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되었다. 탕사오이 사직 이후 동맹회는 영미의 방식을 모방하여 정당 내각을 조직하여 내각의 모든 각료들이 동반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안스카이에게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완전한 정당 내각을 채택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내각은 수개의 정당이나 무소속과 공동으로 연합하여 조직하지 않으면 결코 원만한 내각을 조직할 수 없다며 동맹회의 주장에 반대했다. 통일공화당은 탕사오이의 사직을 만류하는 한편, 만약 탕사오이가 끝끝내 사퇴한다면 국무총리만 바꾸고 각료는 그대로 남게 하는 [[프랑스]], [[일본]]의 방식을 모방할 것을 주장했다. 공화당은 일부는 정당내각론을, 일부는 독일식 초당내각론을 주장했다. [[위안스카이]]는 모든 정당의 요구를 듣지 않고 초당적인 총리와 혼성내각을 채택하여 무당파이며 만만하여 이용하기 쉬운 육징상을 아예 정식 국무총리로 추천하였는데 동맹회는 격렬히 반대했으나 [[리위안훙]]의 공화당과 통일공화당이 루정샹을 지지하여 6월 29일, 참의원에서 루정샹의 정식 국무총리 임명안이 통과, 루정샹은 중화민국 2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루정샹은 어디까지나 '''외교관으로만 유능한 인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